아침 먹고 설거지를 반쯤 했을 때 글거리가 떠올랐다. 잠깐 망설였다. 핸드폰에 메모를 할까? 고무장갑을 벗고 다시 끼기가 귀찮았다. 설거지 끝나고 바로 직접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글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려던 것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도 기억한다. 글거리만 기억나지 않으면 건망증, 기억하려던 것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면 치매라는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아본다. 그래봤자 큰 위안이 되진 않는다.
치매가 심해지면 지금 생각하는 걸 돌아서면서 까먹기도 한다는데. 지금 내 나이로는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다시 기억을 떠올린다. 그릇과 관계된 것이었다는 건 분명하게 기억한다. 한번에 써내려가긴 힘들어졌지만, 쓰는 데 큰 문제는 없겠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
지난 해 늦가을, 몇 년 만에 이천을 찾았다. 이천에 가는 이유는 정해져 있다. 쌀밥을 먹고, 사기막골 도예촌에 가서 그릇 구경을 하기 위해서다. 도예촌의 느낌은 예전 대로지만, 주차장이 변해 있었다. 도예촌 맨 안쪽에 크지는 않지만, 주차장 자리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래, 이래야지’ 하면서 도예촌 구경에 나섰다.
도자기 가게를 돌아볼 때 문제가 하나 있다. 물건을 사지 않고 가게에서 나올 때 눈치가 보인다는 점이다. 그걸 뭐 신경 쓰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찌 그렇게 당당하거나 뻔뻔하기가 쉬운가 말이다. 그래도 볼 건보고, 살 게 있으면 사면된다는 당연한 마음으로 구경에 나선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물건을 안 산다고 눈치 주는 일이 거의 없어서 한결 마음이 편하다.
코로나 탓인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 거의 없다가 아니라, 아예 없다. 날씨가 쌀쌀하기 때문에 더 그런가 보다. 가게 주인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물건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바가지를 씌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할 걱정만 하자고 마음을 다시 정리한다.
사려는 물건을 딱 정해놓은 게 아니라서 물건 사기가 쉽지 않다. 돌아보면서 마음을 정했다. 아내가 자기 밥그릇과 국그릇을 사겠다고 한다. 방향이 정해지니까 그릇을 보는 방향이 생긴다. 가게 몇 곳에 들어갔다 나왔다. 빈손으로. 도예촌 맨 끝의 주차장에서부터 입구 쪽으로 걸어 내려왔는데, 이제 가게가 서너 곳 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사려는 물건은 정하지 못했다.
마지막 가게 세 곳이 모여 있는 데에서 맨 가운데 가게 하나를 찍었다. 볕이 잘 드는 가게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30대 여성이 인사를 한다. 모른 척 하는 것도 아니고, 호들갑스럽지도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 천천히 둘러보란다. 나는 조금 건성으로, 아내는 조금 진지하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내의 마음이 움직인다. 나한테 묻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지 않은 그릇을 들어올린다. 아내의 눈치를 잠깐 살핀다. 내가 답했다. 엉, 좋아. 색깔이 특이하네. 색깔이 진하지도 옅지도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 색깔이 보라색이다. 요리나 반찬을 담는 그릇이라면 모를까 매일 밥과 국을 먹는 그릇으로 쓰자면 물리지 않을까 하는 속마음이 있지만 나는 좋다고 답했다.
맨 아래에 놓여있는 두 그릇이 우리 부부가 구입한 그릇이다. 이번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내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게다가 할인 중인 품목이라고 한다. 할인 때문인지 ‘생각보다 가격이 싸다.’ 잠깐 생각해 보니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생각보다 싸려면 먼저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아예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상적인 그릇 하나에 십만원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 아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 수도 있겠다.
쓸 데 없이 복잡한 내 머릿속과 달리 아내의 결정은 단순 명쾌하다. 아내는 그렇게 밥그릇 하나와 국그릇 하나를 골랐다. 양손에 그릇을 하나씩 들더니 그제사 옆에 있는 내가 떠오른 모양이다. 뒤늦게 남편을 챙기는 아내에게 나는 쿨하게 답했다. 나는 그냥 지금 그릇 쓰면 돼. 혹시 마음이 생기면 그때 다시 오지 뭐.
이렇게 보라색 밥-국 그릇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인연이 생기자 나는 묵은 인연을 떠올렸다. 내가 ‘석하(石河)’ 자기(磁器)를 만난 게 몇 년이 되었나. 결혼할 때 장모님이 마련해 주신 그릇이니까 만 32년 반이 넘었다. 그 엄청난 시간을 떠올리니까 나는 갑자기 오늘 아내 그릇만 한 벌 사고, 내 그릇은 사지 않은 게 괜히 잘 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