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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pr 01. 2021

할머니는 '따로' 소고기만두를
빚으셨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평안도 출신 분들이셨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겨울이면 만두와 빈대떡을 자주 먹었다. 늘 자신이 음식 솜씨가 없다며 겸손해 하시던 할머니께서 만드신 음식이었다. 두 음식의 기본 재료에는 돼지고기가 포함된다. 그런데 나는 예닐곱 살 무렵 돼지 키우는 모습을 보고 ‘더럽다’는 생각에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평생을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 할머니는 이런 나를 야단치셨다. 먹는 걸 가리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1896년 생 다운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은 오래 가지 않았고, 할머니는 편식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포기하셨다. 배우는 학동의 자세가 안 돼 먹어서 가르침의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셨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그 후 할머니는 나를 위해 소고기를 넣은 만두를 따로 빚으셨다. 할머니 만두의 기본형은 모자형이었는데, 내 만두는 반달형이었다.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소고기를 넣은 할머니의 만두, 이제는 내가 직접 만드는 명절 음식이 되었다. 할머니는 또 돼지고기를 얹지 않은 빈대떡도 한 두장 부쳐주셨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물에 불은 녹두를 맷돌에 갈았다. 주전자 뚜껑으로 만두피를 찍어내서 만두를 빚기도 했다. 그 경험과 기억이 어쩌면 지금 내가 음식을 만드는 씨앗인지도 모른다.


지난 설에 신데렐로가 빚은 소고기만두. 이제 거의 다 먹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의 어머니는 손이 빠른 분이 아니셨다. 음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셨다. 더군다나 50대 후반에 크게 아프신 후에는 몸놀림이 더 느려지셨다. 그럼에도 명절에는 꼭 해야 하는 음식이 있었다. 설의 떡국과 추석의 토란국, 그리고 약식이다. 떡국과 토란국은 주식에 속하니 그렇다 쳐도, 왜 약식이 매번 거기서 나오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몸이 불편하니 집중력도 떨어져서 약식은 타버리기 일쑤였다.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며 탄 부분을 떼 내고 먹으며 덕담을 나누는 일은 드라마에만 존재했다. 나는 ‘사먹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만드시느냐’며 못된 아들 노릇을 톡톡히 했다. 타버린 그 약식에 보통 약식에는 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타버린 약식. 나에게 남은 어머니의 음식이다.


결혼 첫 해 추석. 처갓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였다. 밥상에 토란국이 놓였다. 토란국이 밥상머리의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처가 식구들은 그날 토란국을 처음 먹어본다는 것을. 서울 사위 덕에 이런 음식도 먹어본다고 했다. 덕담인지 무언지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였다. 그 자리의 막내로서 그런 대접이 조금 불편했다. 나는 넓지 않은 나라에서 음식 문화가 그렇게 편차가 있는 줄은 몰랐다. 먹기만 처음이 아니라 보기도 처음이라니.


소고기국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토란국을 먹인 장모의 설명이 있었다. “자네 땜에 내가 이걸 난생 처음 만들어보았네. 처음이라, 어떤지 모르겠어. 맛이 없어도 잘 먹게.” 나는 지금 드라마를 찍나 하는 생각을 했다. 콩트의 마지막 대목 같기도 했다. 그 토란국에는 막내 사위를 위한 음식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토란국은 나에게 남은 장모님의 음식이다.


부모님은 말년에 두 분이 함께 아프셨다. 두 분만 같이 지내셨기 때문에 간병인이 꼭 필요했다. 아주 어렵게 집에서 숙식하는 간병인을 구했다. 중국 동포분이셨다. 음식을 못해서 안 된다는 분을 억지로 ‘모셔왔다.’ 


어느 날 부모님 집에 갔더니, 밥상에 만두가 등장했다. 어머니는 아줌마가 빚었다고 했다. "음식 못 하신다더니" 하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주머니는 만두를 먹지 않는 내게 맛이 없어서냐고 물었다. 돼지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후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식탁에 다시 만두가 올라왔다. 나는 뜨악했다. 이건 뭐지? 틀림없이 안 먹는다고 이야기했는데. 설마 소고기? 그랬다. 그래서 놀랐다. 물었다. 맞았다.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놀라지 않으면 그건 모자라는 사람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간병 아주머니도 떠났다. 만두는 나에게 사람 사이의 정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남았다. 


나는 근 30년을 아내가 만들어주는 밥을 먹고 살았다. 정확히는 28년 2개월에서 며칠 빠진다.  사랑과 정성도 하루 이틀이지 오랜 시간 참 고생 많았다. 나의 부드럽지 못 한 성격은 음식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복 받지 못 하게 음식 타박도 많았다. 지금 내가 직접 밥을 해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모자라는 행동이었다. 


신데렐로가 직접 만든 토란 조림. 결혼 초 토란국과 토란 조림을 전혀 먹지 않던 아내가 지금은 두 가지 다 잘 먹는다.


지금, 아내가 나에게 차려줬던 2만 끼니가 넘는 음식 가운데 무언가를 가려 뽑자니 이걸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고민 끝에 선택했다. 아내가 만들어 준 감자튀김이다. 


나는 내 생일에 특별한 음식을 원했다. 아내는 물었고, 나는 답했다. 여러 경쟁 음식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감자튀김이 선택되었다. 채친 감자에 양파와 당근을 채쳐서 함께 넣고 밀가루 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 음식. 초간장에 찍어먹으면 맛이 폭발한다. 결혼 초에는 한 분식점에서 자주 사다 먹기도 했던 음식. 내가 밥을 책임진 후에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음식.


내 생일은 한여름이다. 삼복염천 직전이다. 그때 팔 걷어붙이고 튀김을 해내라는 요구를 하는 남편, 내가 그런 인간이다. 아내는 그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남편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한여름의 감자튀김은, 음식은 정성으로 만드는 것임을 나에게 각인시켰다. 나는 지금 내 생일에 늘 감자튀김을 떠올린다. 먹건 먹지 않건.


아내는 이렇게 유형적인 표현 외에 무형의 표현도 했다. 내가 평생 그렇게 많이 술을 먹었건만 다음날 아침에 이른 바 해장국을 먹어본 기억은 없다. 이제는 안다. 그것 또한 아내의 사랑이었음을. 속쓰림을 통해 나에게 전해 준 ‘술은 몸에 좋지 않으니, 그만 먹으라.’는 가르침. 부재를 통해 존재를 알려주었는데, 둔해서 이제야 깨닫고 있다. 


직접 밥을 해보니 이제는 잘 안다. 집단 급식으로 만드는 음식들은 왜 맛이 덜한지. 소수의 고객들을 위해 만드는 레스토랑의 특별한 음식은 왜 맛이 있는지. 돈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나와 아내를 위해 만드는 음식이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맛인 것처럼. 


나는 오늘도 그 특별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식칼을 들고 도마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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