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외출하면 안 돼. 혹시라도 외출할 일 있으면 마스크 꼭 껴야 돼. 이거 끝날 때까지 버티는 거야.
엄마, ‘존버’ 알지?”
“알어. 지금도 존버하고 있어.”
인터넷에서 얻어들은 일화다.
코로나 세상이 1년을 훌쩍 넘겼다. 코로나 형국에서 존버(*) 만큼 존재값을 드러내는 신조어가 있을까. 그 단어가 함유하고 있는 저급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지는 존버. 군대 남자들 사이에서 쓰면 어울릴 법한 이 단어가 이제는 나이와 성별 차이를 넘어 무차별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월급쟁이였다. 사회생활 시작부터 월급쟁이를 하다가 중간에 잠깐 자영업자가 되기도 했으나, 내 아버지에게는 월급쟁이가 더 맞았던 모양이다. 월급이라는 신성한 단어 뒤에 쟁이라는 사뭇 격 떨어지는 단어를 붙여 만든 단어, 월급쟁이. 그 단어에서 풍겨나는 강렬한 을의 느낌. 나의 아버지는 그런 을이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려 70세까지 월급쟁이 을을 하셨다.
나의 장인도 월급쟁이였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시작해서 막판에는 꽤 큰 회사의 사장 노릇도 하셨지만, 그때도 창업주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을의 신분에는 변함이 없었다. 장인도 70세까지 을 노릇을 하셨다.
월급쟁이 아버지의 아들이자, 월급쟁이 장인의 사위였던 내가 월급쟁이를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그림이었는지 모른다. 나도 막판에 잠깐 자영업을 하기도 했으나, 내 직업의 근간은 월급쟁이라고 나 스스로도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월급쟁이의 세계를 알 만큼은 알고, 할 말도 꽤나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의 아버지와 나의 장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훨씬 오래 월급쟁이를 하셨으니 당연히 할 말도 많으셨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접한 주변 사람들은 ‘이제 저 인간도 나이가 들었군’하고 이야기할 것 같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서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만시지탄이기는 하나, 지금이나마 두 분의 세계를 이해하게 돼서 좋은 점도 많다.)
월급쟁이의 특징을 몇 가지만 정리해 본다.
월급날을 기다리지 않는 월급쟁이(이하 ‘월쟁’)는 없다. 연휴 끝에 기쁜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월쟁은 거의 없다. 아니, 없다. 월급(연봉도 마찬가지다)은 많을수록 좋고, 근무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한달 동안 일한 대가로 주는 월급을 받으며, 회사에 고마운 마음을 갖는 월쟁은 거의 없다. 사표 쓰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자도 없다. 술자리 뒤끝이든 지인들 틈새에서건 회사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과장해 보지 않은 월쟁도 거의 없다. 그밖에도 많은 특징이 있겠지만 굳이 더 쓸 필요 없겠다. 써보았자 좋은 이야기는 별로 안 나오겠고.
이런 월급쟁이의 일반적 속성은 아마도 나의 아버지와 장인 두 분 모두에게도 해당됐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내 아버지가 나처럼 “에이, ##워서 그만 둬야겠다.”고 수시로 뇌까리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수시로가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장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위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장인이 과연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두 분은 그 숨 막히는 직장 생활을 어떻게 버텨내신 것일까. 월급날을 기다리며 버티고, 자식 새끼들 생각하며 버티고, 지금 나가면 어디 다른 데 갈 데가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버티고.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인생은 존버’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삶이 존버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선배 존버가 나와 아주아주 가까운 거리에 두 분이나 계셨다. 두 분 다 일흔이 넘도록 월급쟁이를 하셨으니, 그 존버 내공은 나처럼 육십도 되기 전에 일하기를 멈춘 자로서는 헤아리기 힘든 경지일 것이다.
올해로 장인께서 돌아가신 지 1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시간은 늘 그렇듯 참 무심하다. 참을성 달인의 경지를 보여주셨던 나의 장인 서OO 옹. 그리고 나의 아버지 박OO 옹. 존버를 입에 달고 사는 험한 시기에 다른 이유로 두 분의 달인을 떠올려본다. 써놓고 보니 꽤나 불경스럽다. 효심이 느껴지기를 바랐는데.
*존버 : 조금 어렵게 이 존버를 설명하자면,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의지로 참아내는 것’ 쯤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