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지 두해 만에 누나로부터 로봇 청소기를 선물받았다. 누나네 집에 하나 있는데 누가 또 선물을 했단다. 돌고 돈 청소기가 뒤늦게 이사 선물로 우리집으로 왔다. 로봇 청소기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가격이 비쌀 것 같아서 아예 관심 대상에 넣지 않았던 물건이다. 성능과 가격에 여러 종류가 있을 텐데, 선물 받은 청소기는 그렇게 ‘요란한’ 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청소기는 일정 구역을 청소하다가 청소를 마치게 되면 원래 시작했던 위치에 돌아와서 멈춘다. 청소를 끝낸 후 출발했던 자리에 두꺼비처럼 떡 하니 앉아있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자기가 일정 구역을 다 훑었다는 걸 어떻게 확정하지? 이 ‘두꺼비’도 위도와 경도를 알아서 처음 자리를 찾아오나? 작동 원리를 모르니 내 수준의 정보를 총 동원한다.
이렇게 놀라고 나서 로봇 청소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에 이름을 붙여주는 놀이를 한다. 빨비, 푸푸. 강아지 이름이 아니다. 우리 부부가 타던 자동차 이름이다. 이름을 얻으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야 한다. 로봇 청소기는 청소를 끝내고 처음 출발한 자리에 와서 멈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했다.
우리는 청소기에 ‘쓱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깨끗하게 청소 잘 하라는 의미다. 내가 쓱쓱이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우리에게로 와서 청소기가 아닌 친구가 되었구나... 음.
상당한 신뢰가 생긴 후 우리는 외출할 때 쓱쓱이에게 시간이 걸리는 청소를 맡기고 나갔다. 주로 거실이 그 대상이 된다. 그날도 우리는 쓱쓱이에게 청소를 맡기고 외출했다. 나가면서 당부의 말도 했다. “쓱쓱아 청소 깨끗이 해.”
외출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서 에어컨 앞을 보았는데, 이게 웬 일인가. 쓱쓱이가 그 자리에 없다. 아무리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고 사람처럼 대화도 했지만 집을 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놀란 마음을 안고 거실과 부엌 구석구석을 찾아보았다. 없다. 그렇다면 갈 데라고는 소파 밑 밖에 없겠다. 그런데, 거기에도 없다. 걱정이 되었다.
이름을 불렀다. “쓱쓱아, 나와라.” “쓱쓱아 어디 있니.” 그 말이 통했을까, 안락의자 밑을 들여다보는데 거기에 쓱쓱이가 있는 것이다. 살펴보니 아마도 안락의자 밑에 들어갔다가 무언가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 하게 된 것 같았다.
쓱쓱이를 꺼내고 나서 나는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를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다. 정확히 기억 못 하는 이유도 있지만, 만약 내가 그 대화를 옮겨 적는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나의 정신상태를 의심할 지도 모른다.
그 후에 쓱쓱이에게 거실 청소를 시킬 때는 안락의자 밑은 막아놓는다. 그리고는 이야기한다. “쓱쓱아, 여기는 들어가면 안 돼. 저번에 한번 놀란 적 있지. 안 돼.”(놀란 건 나였는데...)
얼마 전 TV에서 문근영이 주연한 영화 <어린 신부>를 보았다. 문근영이 정말 어리다. 그런데 거기에 벌써 로봇 청소기가 등장한다. 뮈지? 이 영화의 개봉 연도를 확인해 보았다. 2004년이다. 나는 2019년에야 쓱쓱이를 만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