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가 아버지 기일이었다. 떠나신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래서 나이 먹으면 ‘세월 참 빠르다’ 같은 소리를 하는 모양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족 모임 인원도 제한이 되는 와중이라 고민이 컸다. 나의 형제는 2남 4녀, 무려 6명이나 된다. 5개월 전 어머니 기일에도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없었다. 몇 번에 나눠 모일 수도 없고, 한 번에 모일 수도 없는 모순의 시간이 계속된다.
보통 때는 부부가 함께 모이는데, 이번에도 어머니 기일처럼 참석자를 제한해야 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 산소는 같은 묘지 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2개 조로 나눠서 성묘를 해야 하나? 너르디너른 야외에서 무슨 일이 있겠어? 백신 접종을 한 인원이 5명이나 되는데 이러면 괜찮은 것 아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생 하나가 입바른 소리를 했다. “직계 가족 모임은 되고, 방계 가족은 안 되는 기준은 뭐야? 우리 가족처럼 형제들 나이가 많을 때, 부모님이 계신 경우가 얼마나 돼?” 힘들게 공부시킨 부모님이 보시면 흡족해하실 소리였다.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있고, 억지로 해서 안 될 일도 있을 터. 억지를 오래 계속한다고 합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창궐하는 다른 나라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답은 없고, 의문만 많은 희한한 세상. 그 한복판에 내가 있다.
한데 모여 있는 여러 사람이 외모도 비슷하고, 말투도 비슷하다. 웃고, 말할 때의 몸동작도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과 섞어놓고 공통점을 연관 지으라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듯하다. 이런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있다. 가, 족.
우리 사회에서 가족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 가운데 촌수(寸數)라는 것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친족 사이의 멀고 가까운 정도를 나타내는 수, 또는 그런 관계’로 되어 있다. 조금 더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이 촌수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분명한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기록상 조금 더 올라가면 고려시대까지도 소급이 가능한 모양이다.
부모 자식 간은 1촌, 형제간은 2촌. 이를 바탕으로 외연을 무한 확장할 수 있다. 나와 아버지(혹은 어머니)의 형제분들과는 3촌. 나와 어머니(혹은 아버지)의 자식들과는 4촌. 그 4촌의 자식들과 나와는 5촌. 아버지 기일에 모였던 우리 형제들은 촌수 상으로 모두 등가(等價)였다. 2촌.
혈연관계를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참으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다’, 하려다 보니 이건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 당위(當爲)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부모-자식간의 가까움은 이러해야 하고, 형제들 간의 가까움은 저러해야 하고...
당위임을 더 확고하게 해 준 것은 부부의 촌수 무촌(無寸)이 지닌 중의(重義)다. 1촌도 아닐 만큼 아주 가까운 관계, 하지만 일단 멀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무(無)가 될 수도 있는 관계. 그런 먼 관계가 되지 않고, 1촌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가 되도록 하라. 0촌.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창의성의 끝판이다. 0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인도 사람도 놀랄 판이다.
“촌수만 가깝다고 가족이 아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도 툭 털어놓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금방 떠올리고,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연락해서 마음을 풀 수 있는 관계. 그런 관계가 되도록 하라.” 이것이 진정한 촌수의 근거일 것이다.
‘가족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일본 유명 배우의 말은 위의 정답 같은 가족 관계의 부정이 아니라, ‘당위의 역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성묘 조차 하기 힘든 부모님 기일에 생각이 여러 갈래로 번져나간다.
*이웃 100촌 : 아파트에 사는 나의 앞집 사람은 3개월 쯤 전에 이사 왔다. 인사 나눌 기회를 기다렸으나, 아직까지 만나지 못 했다. 1층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타서 나와 같은 층을 누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택배 아저씨들 빼고). 지금 나는 그 사람을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 100촌’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