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책의 교정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의 두 번째 책의 교정-교열 작업을 시작했다. 한 달 여 전,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됐다고 넉살좋게 자찬(自讚)한 그 책이다. 제목도 확정했다. <남편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 내 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자니 타이핑이 몹시 힘들다. 손이 오그라들어서...
교정-교열 작업을 하자니 책을 펴낸다는 것이 실감난다. 출간 막바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사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교정과 교열에 관하여 거칠게 정리하면, 원고의 오자나 탈자를 바로잡는 것은 교정(校正)이고, 주술 관계가 비틀어진 비문(非文)을 바로잡는 것은 교열(校閱)이 된다.
이처럼 교정과 교열은 내용 면에서 차이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교열을 언급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정으로 통칭하겠다.
내가 대학 다니던 옛날에는 교정 작업을 원고지에다 했다. 작가 자신이 줄을 죽죽 긋고 고쳐쓰기도 하고, ‘돼지꼬리’를 붙여 단어나 문장을 날리기도 했다. 한자어 요철(凹凸)을 세로로 세운 것과 비슷한 표시로 원고를 내어쓰거나 들여쓰라고 하기도 했다. 기자들 세계에서 이른 바 데스크는 후배들의 원고에 붉은 펜으로 교정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도 했다.
책 출판이 가까워오고 3교 쯤 되면 인쇄된 출력물 위에 비치는 종이(옛날 습자지 비슷한 종이)를 덮고 그 위에 표시를 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선배가 원고 교정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본 것이다.
컴퓨터로 원고를 쓰기 시작한 후, 화면에서 교정을 보라면 오자가 보이지 않는다며 굳이 프린트를 해서 원고 교정을 보던 때도 있었다.
이 교정은 인간이 하는 행위가 완벽할 수 없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얼떨결에 첫 책을 낼 때는 출간 과정의 행위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두 번째가 되니 못 보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첫 책의 출간을 준비할 때, 소식을 들은 가까운 후배가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교정을 봐주겠다고 했다. 그 후배는 여러 권의 책을 써낸 대학 교수다. “네가 안 봐줘도 돼, 내가 잘 봤어.”하고 응수했다. 나중에 책을 건네주었는데 아무 말 없는 걸로 미루어 교정으로 지적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괜히 께름칙해 다시 꼼꼼히 읽었다.
교정으로 지적할 사항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한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문법에 어긋난 것은 아니지만, 인접한 문장에서 같은 단어를 두 번 쓰는 일종의 ‘동어반복’ 오류가 눈에 띈 것이다. 수백 개의 문장 가운데 한 문장이 지적 거리라면 잘 한 일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으나, 유리에 금간 것으로 치자면 하나나 세 개나 마찬가지 아닌가.
얼마 전 유명 작가가 쓴 소설책을 읽었다. 전체 800쪽에 달하는 두 권으로 된 두꺼운 소설책이다. 나름 이름을 얻은 작가인 만큼 내용이야 좋다고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많이 아쉽게도 오자가 수두룩했다. 처음 몇 개의 오자를 발견하고는 그 작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교정을 봐서 출판사에 전해줄까 하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오자가 계속 나오자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면서 출판사와 편집자를 비난했다. 작가와 책에 대한 신뢰도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책의 내용 못지 않게 교정이 중요한 이유다..
이번 초교 단계에서 대박을 터트린 건이 하나 있었다. 병기(倂記)한 한자가 틀렸던 것이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발견했다. 전적으로 내 실수였다.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 오류를 보면서 머리가 아뜩해졌다. 교정 볼 때면 나름 눈 밝다고 큰소리 쳤는데, 돋보기 탓을 할 수도 없고. 만약 그게 책으로 그냥 나갔다면... 정말로 모골이 송연한 일이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교정 없이 완성되는 책은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이번 책 출간 과정에서 깨달은 교훈이다.
초교, 재교, 3교, 마지막 교정까지 적어도 네 번 정도는 교정을 봐야 끝이 날 것이다. 지금 그 중간 도상에 있다. 네 번을 보고도 실수가 남아있는 게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게 그렇게 불완전하다. 실수 찾아내는 일을 하다보니 겸손하고 솔직해졌다. 망외(望外)의 소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