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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Feb 12. 2021

그들은 설거지로 입문한다

은퇴자와 그 아내의 공방전에 관한 농담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곰탕을 끓이면 긴장해야 한다.

이사 갈 때는 먼저 이삿짐 트럭에 올라타고 있어야 한다.

아내가 외출할 때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아야 한다.

주로 수동적인 이야기들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보다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대학 선배를 만났다. 나보다 일곱 살 위니까 육십보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다.

어떻게 지내세요.

뭘, 어떻게 지내. 집에 들어앉은 지 5년도 넘었어.

형도 집에서 부엌일 같은 거 하세요.

엉, 하지.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설거지는 많이 해.

밥이랑 반찬도 하세요.

아직. 할 수 있으면 해 보려고.


최근에 정년퇴직한 직장 동기에게 물었다. 나랑 같은 나이다.

부엌일 하지?

그동안은 안 했지.

맞벌이인데 안 했다고?

지금은 해. 아내는 아직 직장 나가니까.

너도 참 대단하다. 뭘 하는데.

엉, 설거지 자주해.


ⓒ pixabay


돌아가신 나의 장인은 1920년대에 태어나셨다. 칠십 대 초반까지 직장에 다니셨다. 옛날 분이셨지만, 은퇴 후 집에 계실 때는 라면 정도는 혼자 해 드셨다. 장인의 출생 시기, 그리고 그분의 출신 지역을 생각하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장인도 설거지를 통해 가사일(*)에 입문하셨다.


남자들에게 가장 만만한 가사노동, 부엌일은 아마도 설거지인가 보다.


장인과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도 1920년대에 태어나셨다. 하지만 장인과는 달리 끝까지 가사 노동에 발을 들이지 않으셨다. 라면을 끓여먹는다? 그런 일은 아버지 사전에 없는 문장이었다. 설거지, 아버지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초심을 끝까지 지킨 대단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타고 태어난 나는 은퇴 후 매일 음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바치고 나도 먹는다. 설거지 따위는 나에게 일도 아니다. 디저트꺼리도 안 된다. 선친께서 보시면 훼절(毁節)했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다. 세상이 바뀐 게 나에게는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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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일’에는 동어반복이 있다. 표준어규정에서는 “‘가사일’은 의미가 중복된 표현이므로 ‘가사(家事)’만을 표준어로 삼고, ‘가사일’은 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가사일로 발음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하여, 표준어규정에서 버린 것을 주워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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