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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Feb 15. 2021

감자야 미안해

나는 감자로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 나는 감자 요리를 좋아한다. 나는 감자 요리라면 무조건 좋아한다. 이 세 문장들 중 어느 것도 지금 내가 표현하려는 나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바꿔본다. 나는 감자를 좋아한다. 이렇게 말하면 감자는 물론 감자로 만든 음식들도 모두 좋아한다는 말이 될 것 같다. 내 의도에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조금 부족한 듯하다. 


나는 감자를 사랑한다.

맞다. 이거였다.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일은 역시 쑥스럽다. 하지만 사랑을 증명하려면 그 정도 과감함은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부끄러움도 감내해야 한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해 보겠다. 

감자야, 사랑해.


나의 감자 사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몇 살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대략 열 살보다 조금 전이었던 것 같다. 내 생일은 한여름이다. 햇감자가 많이 나기 시작하는 때다. 나는 내 생일에 엄마에게 미역국 말고 감잣국을 끓여달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는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어야 해”하고, 어르지도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내 희망대로 감잣국을 끓여주셨다. 나는 만족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감잣국을 내 생일에 먹을 수 있다니.


감자 요리를 생일에만 먹은 건 아니다. 다른 날에도 먹었다. 비싼 재료도 아니고, 만들기 힘든 음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으로만 해 먹은 것도 아니다. 국보다는 오히려 감자조림을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그밖에 감자부침과 감자채나물도 해먹었다. 엄마는 감자 크로켓도 해주셨는데, 이건 아무 때나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 한두 번 먹어본 기억이 있다. 나는 이 모든 감자 음식들을 좋아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음식은 으깬 감자다.




조리법을 간단히 적어보겠다.

껍질을 벗겨 감자를 삶는다. 감자에 분이 막 나거나, 저절로 갈라질 정도까지 삶는다. 어떤 감자 종류는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는데, 이때는 젓가락으로 찔러본다. 푹 들어갈 정도가 돼야 한다. 그 다음에는 삶은 감자를 으깬다. 이때 마가린을 함께 넣어서 으깬다. 나중에 먹어보니 버터를 넣는 것이 더 맛있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아마도 버터 구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 같다. 감자, 버터에 적당량의 소금, 그리고 후추를 넣고 으깬다. 다 으깨지면 마지막 단계에서 마요네즈를 넣는다. 마요네즈는 감자가 질척할 정도로 많이 넣으면 안 된다. 




나중에 보니 이게 서양 요리의 매시트포테이토였다. 유럽 여행 때 이걸 몇 차례 먹었는데,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짰다. 체코 프라하 식당에서 처음 먹고는, 너무 짜서 잘못된 거 아니냐고 물었다. 식당 종업원은 뭐가 이상하냐는 반응이었다. 정상이란다. 나중에 보니 정상이었다.  다른 식당의 으깬 감자도 모두 짰다. 정상이라고는 하나, 이건 지금도 의아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으깬 감자를 먹으며 고교야구를 봤던 한여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프로야구가 없던 그때, 고교야구는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군산상고였다. 내가 감자를 먹으며 보았던 TV에 나온 팀은 그 당시 가장 인기를 끌던 ‘역전의 명수’였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군산상고를 역전의 명수로 기억했고, 나는 으깬 감자로 기억했다. 한여름 낮의 으깬 감자...


내가 감자를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특별한 이유로 꼽을 만한 게 없다. 그냥 맛이 있어서. 오래 먹어 와서. 이런 이유 정도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꼭 집자면 돼지고기는 아예 안 먹고 소고기도 거의 안 먹는데, 감자는 채소류라서 정도가 될까. 더 찾아보면, 나는 이가 부실해서 딱딱하고 질긴 음식을 먹지 못 하는데 감자는 전혀 그렇지 않아서도 이유가 되겠다. 누군가를(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느 날 보니 사랑하고 있더라 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나이를 먹으면서도 나의 감자 사랑은 계속되었고, 결혼 후까지 이어졌다. 결혼 후 약 1년간 직장도 없고, 수입도 없던 상태에서 나는 쉬지 않고 감자를 사먹었다. 아내는 이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라는 것에 대한 우회 비판이었을 것이다. 눈치 없는 나는 감자보다 더 싼 음식이 어디 있느냐고 큰 소리쳤다. 


그렇다. 감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싼 재료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감자먹는 사람들>을 보라.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빈하고, 궁해 보이는지를.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사람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가게 된 것도 감자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었던 감자가 흉년으로 구하기 어렵게 되자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미국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된 배경에는 이렇게 감자의 영향력이 숨 쉬고 있다. 대단한 감자다. 



얼마 후 직장에 다니게 된 나는 적어도 감자를 마음 놓고 사먹을 정도의 경제력은 갖게 되었다. 언제든지 이 대단한 감자를 사먹을 수 있는 경제력이라... 결혼 초기에는 감자튀김으로 내 감자 사랑을 표현했다. 서대문구 어딘가에 살 때였다. 퇴근길에 모 여대 앞 유명한 분식점에서 저녁꺼리로 감자튀김을 사들고 퇴근했다. 정확히는 야채 튀김이다. 물론 그 날은 드물게 집에서 밥을 먹고 술도 마시지 않는 날이었다. 으깬 감자의 아성을 위협하는 감자튀김. 제조 과정의 복잡성 때문에 어린 시절 어머니께 마음 놓고 해달라고 하지 못했던 감자튀김. 아마 어머니께서는 감자튀김에 담긴 내 효심을 잘 모르셨을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감자 예찬을 하다 보니, 무언가 감추는 것처럼 느껴져서 빨리 털어놓아야겠다. 내가 유이(唯二)하게 좋아하지 않는 감자 음식이 있다. 감자옹심이와 감자전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감자 요리임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니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맛이 없다고 느껴서다. 분석해 보니, 두 음식의 공통점이 있다. 감자를 갈아서 만드는 음식이다. 감자를 갈았기 때문에 아마도 감자의 물성(物性)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요즈음 자주 먹는 감자 음식에 프렌치프라이가 있다. 햄버거 가게에서 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내가 좋아하는 감자 음식이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햄버거 대표 세 브랜드 가운데 한 군데를 제외하고, 두 군데의 프렌치프라이는 합격이다. 감자의 크기와 염도, 익은 정도 등 큰 하자가 없다. 최근에는 한 수제 햄버거 가게의 프렌치프라이를 발견했다. 패스트푸드 햄버거 가게보다 더 맛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먹어줄 만하다. 다양성 확보 측면에서 재구매도 했다. 프렌치프라이와 함께 아내가 드물게 좋아하는 감자 음식, 감양당 나물. 보통 감자채 나물이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 집에서는 감자와 양파, 당근의 앞머리를 따서 감양당 나물이라고 한다. (작은 목소리로) 만들기가 조금 귀찮은 음식이다.


자주 다니던 선술집에서 내가 시키는 감자 요리가 있다. 버터 바른 감자구이다. 로바다야끼(버터를 바르지 않고 구운 요리라는 뜻)라는 일본식 명칭에 반하는 버터 바른 감자구이. 그 커다란 감자를 통째로 익히는 테크닉이 궁금하다. 갈라진 감자 사이로 버터를 흘려 넣고 소금만 가볍게 찍어서 먹는다. 얼마 전 그 선술집이 문을 닫았다. 20년 넘는 단골집이 없어져서 슬프고, 통감자구이를 못 먹게 돼서 더 슬프다.


그런데 요즘 나의 감자 사랑에 큰 변화가 생겼다. 종합건강검진에서 무려 15kg을 줄여야 한다는 황당한 요구를 받은 후 감자를 먹는 횟수와 양을 줄이게 된 것이다. 감자가 많이 서운했겠지만 이해할 것이다. 나와의 인연이 어디 한 두 해에 걸친 것인가. 감자뿐만 아니라, 밀가루를 비난하기도 했던 그 영양사를 감자에 대한 무고죄로 고발하고 싶었으나, 내 몸무게가 줄어드는 바람에 무고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워졌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렸을 때부터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는 감자 사랑. 요즘 어쩔 수 없이 조금 식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래 전 영화배우 커플이 이혼하며 남겼다던 명언 아닌 명언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논리가 서려면, ‘사랑하지만 헤어진다.’가 돼야 하는 거 아냐?


감자는 이해할 것이다. 사랑하지만 조금 덜 만날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을.


감자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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