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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ug 23. 2021

묵, 실패해서 묵사발이 되다

이곳 브런치에서는 음식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기록은 거의 모두가 음식을 성공적으로 만든 과정이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음식 만들기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불에 올려놓고 깜빡해서 홀랑 태워먹기도 하고, 뭐에 홀린 듯 착각해서 간장이나 소금을 많이 넣어 소태를 만들기도 한다. 재료 선택이 잘못돼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이 실패의 기록들은 브런치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그 찾아보기 힘든 기록을 지금부터 선보이려고 한다. 내가 시도한 음식은 ‘묵’이었다. 더 정확히는 묵무침이다. 요즘 묵 재료는 경험이 없는 요리 초보자도 아주 간편하게 만들 수 있게 제공된다. 그런데 그 묵을 실패하다니... 자, 이제부터 묵 만들기 실패담이 전개된다.




묵은 그 자체만으로는 별 맛이 없는 음식이다. 그래서 양념장이나 나물 등의 다른 재료들을 곁들여서 먹게 된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아주 드물게 양념 없이 묵의 순수함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묵의 한계 때문에 나는 묵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아내는 묵을 좋아한다. 이 다름으로 인해 여러 가지 상황이 생긴다.


우리가 흔히 먹는 묵은 세 가지 정도다. 메밀묵, 청포묵, 도토리묵. 재료만 다르고, 만드는 과정은 대략 같을 것이다. 재료가 되는 곡류를 절구에 빻거나, 맷돌에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다. 그 가루를 물에 풀어 끓이면 묵이 된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한 과정이 오히려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걸 경험 풍부한 사람은 알 것이다. 묵은 그렇게 만만하면서 만만치 않은 음식이다. 여기서는 세 종류 묵 가운데 도토리묵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도토리묵의 재료는 도토리다. 써놓고 보니 김치전의 재료가 김치라는 소리 같아서 조금 이상하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도토리묵에 도토리가 들어가서 도토리가 들어간다고 했는데, 왜 도토리를 넣느냐고 하시면...’


상수리나무라고도 하는 도토리나무는 산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열매가 열린다고 했다. 옛 사람들은 가물어서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게 없을 때는 굶어죽지 않도록 열매가 많이 달린다고 이해한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생각해 낸 나름 합리적인 설명은 도토리나무는 날씨가 가물 때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라는 것이다. 궁핍하게 살던 옛 사람들은 그 이치를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키고, 자연에 대한 고마움으로 승화시킨 것 같다. 그렇게 구황식물이던 것이 지금은 별식이 되었다.

상수리나무는 영어로 oak tree 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가 도토리나무?(출처-pixabay)


오래 전 ‘울고 넘는 박달재’의 고장인 충북 제천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 관광지에서는 그 지역의 전설을 소재로 한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를 가는 곳마다 틀고 있었다. 이 노래와 함께 나에게 각인된 것이 도토리묵이었다. 거의 모든 식당에서 도토리묵을 팔고 있었다. 1박2일 머무르는 동안 박달재 노래와 도토리묵으로 세뇌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도토리묵 무침과 묵사발이 먹을 만한 정도를 넘어 맛있다고 느낄 정도까지 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음식점에서 도토리묵을 파는데 피해갈 길이 없어 먹게 되었고, 천만다행으로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일부러 찾아먹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아내는 어릴 적 먹었던 기억 때문인지 가끔 먹고 싶어했고, 음식점에서 시켜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처형이 홈쇼핑에서 묵을 샀다면서 도토리묵 재료를 보내주었다. 받아보니 분말이었다. 내가 아는 묵과는 달랐다. 내가 아는 묵이란 당연히 젤리처럼 생긴 고형의 그 무엇이다. 많은 것이 현대화, 간편화되는 세상에 묵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아내가 그 분말로 묵을 만들었다. 한 봉지에 들어있는 분말 120g을 1리터 정도의 물에 풀어서 천천히 저어주며 끓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분말이 뭉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가급적 한 방향으로 저어주는 것이 좋다. 축약하면 이것이 묵 만드는 과정의 전부다. 


그렇게 몇 차례 묵을 만들어 먹었다. 박달재와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묵 요리를 먹었다. 하나는 묵무침이다. 말한 대로 쑤어서 만든 묵에 양념장을 얹어 먹는 것이다. 양념장이야 두부조림 양념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 하나는 묵 분말과 함께 들어있는 묵 육수에 묵을 넣어 만드는 묵사발이다. 묵사발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나왔지만, 그 바람에 묵에 대한 호감도 생겼다. 묵사발 육수는 다른 냉동식품의 육수와 유사한 맛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런데 문제는 묵을 저으면서 끓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상당히 길고, 노동이 만만치 않다. 상당한 인내를 요한다. 이 노동이 쉽지 않다보니 아내가 나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자칫 한 눈 팔면 타기도 했고, 느리게 젓다 보면 분말이 덩어리져 뭉치기도 했다. 냉동 칸에는 묵 분말이 가득했고, 나는 계속해서 묵 만들 일이 아득했다.


이 상태에서 어느 날 TV 생활요리 프로그램에서 전자레인지로 묵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 핵심은 묵을 젓는 과정을 전자레인지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다.  설명하자면,


묵 가루를 전자레인지 전용 용기에 넣은 후 물에 푼다. 이때 물의 양이 두 배인가 세 배라고 한 것 같다. 잘 푼 다음 5분간 전자레인지에서 가열. 그리고 꺼내서 엉긴 상태의 묵을 휘저은 후 다시 2분간 가열. 그러면 끝이다.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다. 전자레인지로 달걀찜 만들기보다도 쉬워보였다. 아내에게 큰 소리 치며, 이번에는 내가 묵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물의 양이 두 배인지 세 배인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아내는 1리터 정도는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물 양의 세 배쯤이나 된다. 아내가 인터넷을 뒤졌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간신히 정보를 하나 찾았다. 세 배인 모양이다


세 배의 물에 분말을 푼 후 전자레인지에 넣고 5분간 가열했다. 그리고 꺼냈다. 밀도가 너무 높다. 이대로 계속 2분을 더 가열하면 벽돌처럼 될 것 같다. 물을 150밀리리터쯤 더 넣었다. 총 500밀리리터, 즉 분말의 네 배 정도 양을 넣었다. 뭉친 묵을 억지로 저은 후 2분간 더 가열했다. 완성된 모양은 묵 비슷하다. 다른 그릇에 쏟았다. 안 쏟아질까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떨어졌다.


아주 조금 떼내서 한 입 먹어보았다. 아내에게도 먹어보게 했다. 먹을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평소 먹어본 묵의 밀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정상적인 묵과 고무 타이어의 중간쯤 되는 밀도다. 뚜껑을 덮고 식히기 시작했다. 혹시 식으면 달라질까 기대하며... 두어 시간이 지났다.


식은 묵을 잘라보았다. 다행히 잘리기는 한다. 하지만, 칼이 잘 들지 않는다. 칼을 갈았다. 묵을 자르다 말고, 칼을 갈아야 하다니. 이건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예감이다. 보통 묵 요리의 절반 정도 크기로 잘게 잘랐다. 그리고 아내가 만든 양념장을 끼얹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에 있다. 

진짜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묵사발 인증 샷.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눈을 불편하게 해서 죄송...

나는 먹을 수 없다에 한 표를 던졌고, 아내는 먹을 수 있다에 한 표를 던졌다. 나는 자수한 죄인이 되었고, 아내는 너그러운 판관이 되었다. 묵무침을 두 어 입 먹은 후 우리는 다시 조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묵 육수를 뜯었다. 그리고 실패한 묵무침을 넣어 ‘묵사발’을 만들었다. 묵사발은 국물 덕에 후루룩 후루룩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이런 음식을 음식점에서 내놓았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한여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묵무침이 묵사발이 되는 과정을 기록한다. 기록을 마치면서 냉동실에 남아있는 도토리묵 분말이 몇 봉지나 되는지 머릿속으로 헤아린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묵 분말이 전자레인지를 잘못 거치면  묵무침이 아니라 묵사발이 된다. 간혹 인생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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