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이 나왔다.
추석이 3주 넘게 남았는데 햅쌀이 벌써 나왔다. ‘벌써’라 쓰니까, 햅쌀이 언제 나오는지 아는 사람 같다. 그건 아니고, 추석 가까이 돼야 햅쌀이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는 뜻이다.
내가 부엌살림을 맡아한 지 4년이 넘었다. 추석을 맞는 건 올해로 다섯 번째다. ‘추석이 되면 때맞춰 햅쌀밥을 먹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늘 먹던 쌀이 남아서 추석이 지나고 나서야 햅쌀을 샀다. 이번에는 별렀다. 딱 맞춰 먹던 쌀을 다 먹은 후 햅쌀을 사서 추석 때 먹어야겠다고.
그런데 예상보다 쌀이 먼저 떨어졌다. 7월 중순에 쌀을 사면서 두 달은 먹을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예상보다 빨리 쌀을 다 먹었다. 5kg짜리를 샀어야 하는데 4kg짜리를 산 게 실수였다.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밥 먹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감안하지 못 했다.
열흘 정도만 더 먹고 쌀을 사면 될 것 같아 햇반으로 버티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고, 쌀을 사기로 했다. 이 쌀을 먹다가 다 못 먹고 추석이 되면, 햅쌀을 사서 추석에 먹으려는 알량한 생각을 한 것이다.
우리 집은 온라인 마트에서 쌀을 사 먹는다. 아내에게 쌀을 주문하라고 했다. 2kg 짜리도 있다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4kg을 사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아내가 “햅쌀이 나왔는데...” 하는 것이다. 나는 햅쌀이 추석 임박해서 나온다는 생각만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계획만 열심히 세운 꼴이 되었다.
햅쌀의 브랜드를 물었더니 우리가 사 먹던 쌀 중 하나였다. 4kg을 주문하라고 했다. 올해 수확한 쌀이 맞느냐고 다시 물었다. 도정만 최근에 한 거 아니냐고 의심을 증폭시켰다. 햅쌀이 맞다고 한다.
30년 전 첫 해외여행을 할 때였다. 열흘 동안 중국의 상해, 서안, 북경 등을 돌아다녔다. 쌀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먹어본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중국 쌀은 우리가 먹는 쌀과는 많이 달랐다. 찰기가 부족했다. 주먹으로 뭉쳐도 잘 뭉쳐질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맛도 달랐다. 단지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쌀 맛이 훨씬 좋다고 느꼈다.
여행 열흘이 지나 집밥이 생각날 즈음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연변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연변 역〔站〕이라는 붉은 글씨는 이곳이 중국땅이라고 말했지만, 식당의 밥은 여기는 조선 사람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쌀로 지은 밥이 그곳에 있었다. 연변은 물리적 거리보다 우리와 가까운 곳이었다. 밥상에 얹혀진 고추장은 그 가까움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가 밥 먹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했다. 영화 <당산대형>에서 이소룡이 밥공기를 입에 대고 젓가락으로 쓸어담듯이 밥 먹는 것을 보면서 '우리 쌀과 다른 모양이다'라고 했던 것이 간접 체험이라면, 연변의 쌀밥은 100배는 더 강렬한 직접 체험이었다.
때 이른 햅쌀로 밥을 지었다. 물 양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하고 잠깐 망설였다. 평소에 하던 것보다 아주 조금 물을 적게 잡았다. 다 된 밥을 푸려고 솥을 열어보니 평소와 다른 점을 잘 느끼지 못 하겠다. 퍼 봤지만 그 차이를 느낄 만큼 내 경험이 풍부하지 않다. 하지만 무언가 다를 것이다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비오는 날이라 김치 전을 부쳤다. 햅쌀의 맛을 느끼려고 찌개류의 반찬은 하지 않았다. 어묵조림을 만들고, 냉동에 있던 더덕무침을 꺼냈다. 백반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김도 꺼냈다.
요즘은 흔히 OO 뒤에 소믈리에를 갖다 붙이던데, 햅쌀밥 소믈리에가 된 것처럼 밥을 한 젓가락 먹었다. 밥을 풀 때는 몰랐는데, 씹어보니 달랐다. 상해와 북경의 푸석푸석한 밥과도 달랐고, 엊그제까지 집에서 해 먹던 밥과도 달랐다.
너무 의식해서 다르다고 느끼나 하며, 조금 더 먹어보았다. 다른 게 맞았다. 찹쌀을 섞어 만든 밥처럼 ‘찰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중국 밥과 연변 밥이 다른 이유가 찰기에 있던 것처럼, 평소에 먹던 밥과 찰기가 차이가 났다. 만약에 이렇게 찰진 느낌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햅쌀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아니 수도 없이 햅쌀로 지은 밥을 먹었을 텐데, 그때는 지금처럼 느끼지는 않았다. 마음먹고 체험해보니 다르게 느껴진 모양이다.
햅쌀 덕에 잊고 지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밥을 먹는 사람이다.’ 요즘 수시로 브런치(이 브런치 말고, 먹는 브런치)도 먹고, 빵도 먹고, 파스타도 먹고, 가지가지 먹지만, ‘나는 밥 먹는 사람이다.'
*글 제목 : 영화 <강원도의 힘>을 떠올리며 제목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