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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ug 26. 2021

홈쇼핑 입문기


2주일 전만 해도 내가 하루에 두 시간 이상 홈 쇼핑 채널을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특히 새벽에 홈 쇼핑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출발점은 ‘채널이 저렇게 많은데 볼 프로그램이 없느냐’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다. 100개가 훨씬 넘는 채널을 하나하나 돌리다 보면 어이가 없을 때도 있다. 5초 이상 멈춰서 보게 되는 채널이 하나도 없을 때도 있으니까.


지난해부터는 20여 년 전에 했던 드라마 리바이벌을 쫓아가면서 보았다. 이른바 재방송 정주행이다. 옛날 옛적 본방송 때는 보지 않았던 <겨울연가>, <가을동화>를 비롯해 이미 두어차례 본 적 있는 <아들과 딸>, <청춘의 덫> 등을 다시 보았다.


방송이 끝나 맥이 끊길 때는 30여년 전에 잠깐 보다 말았던 <전원일기>를 한동안 보았다. 무려 서너 개 채널에서 <전원일기> 재방을 하고 있었다. 스토리보다도 ‘저 탤런트는 요즘 뭐할까’를 궁금해하며 지켜보았다. 가장 최근에 본 드라마는 <작별>이다. <작별> 재방이 끝나면서 맥이 끊겼다. 더 이상 볼 채널과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후에는 영화도 시들하다. 맷 데이먼이나 톰 크루즈 같은 헐리웃 배우들의 액션도 하루 이틀이고, 제시카 차스테인의 개성있는 연기도 한두번이다. 호와 불호 사이를 왕복하는 배우들의 관찰도 서너번이다. 가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영화가 혼몽한 내 정신을 일깨우지만, 자주 만나기는 어렵다.


<글라디에이터> 30번 보기나 미드 <CSI> 1000번 보기에 도전해볼까 하는 허망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나 영화도 몇 편 찾아보았으나, 다큐멘터리 <사무라이의 시대> 한 편 외에는 안주할 만한 프로그램이나 영화도 없다.


이때 오아시스를 발견하였다.


홈쇼핑 채널이다. 채널 하나 건너 하나씩 끼어있는 20개도 넘는 홈쇼핑 채널. 왜 내가 이걸 20몇 년 동안이나 완전히 무시했던가. 홈쇼핑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내를 왜 45도 각도에서 사시로 쳐다보았던가. 기껏 주문해서 받은 홈쇼핑 상품을 다시 반품하는 아내에게 그렇게 하다가는 딴 사람이 입다 만 옷 돌려받게 된다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해댔을까.


관점 변화는 새벽에 일어났다. <유퀴O 온O블O>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보는데(채널을 돌리다 걸리면 보곤 한다), ‘1초’라는 주제로 방송된 날 홈쇼핑채널 쇼호스트가 출연한 것을 보았다. 관심이 생겼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편견처럼 ‘혹세무민’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름 전문성을 갖추고 그 위에 끊임없이 자기 계발과 지식 축적, 정보 파악을 위한 노력을 하는 존재로 보였다. 그렇게 관심이 시작되었다.

이틀 후 그 쇼호스트를 홈쇼핑 채널에서 다시 보았다. 옷과 가방, 액세서리까지 여러 브랜드의 명품을 파는 시간이었다. 아내와 함께 보았다. 가방 형태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이름을 대부분 아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더 놀라웠다. 과거 명품으로만 생각했던 익숙한 브랜드의 디자인이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말이 꼬이지 않고,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가는 쇼호스트의 능력이 신기했다.


사진 출처-pixabay


그날 이후 채널을 돌리다 볼 게 없다 싶으면 홈쇼핑 채널을 일부러 찾았다. 아내 설명대로 홈쇼핑 계의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너 댓 개의 채널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새벽에는 재방송을 하는 모양이다. 25년 전 내가 연출했던 비운의 프로그램 <퀴즈! 푸른세상>의 MC였던 강OO씨도 쇼호스트로 나오고 있었다. 관심이 두 배로 커졌다. 수건을 팔고 있었다. 얼마 전 마트에서 수건 4장을 산 게 후회가 되었다. 20장을 한 세트로 8만원 가량의 금액에 팔고 있었다. 미니 목욕타월 두 장을 끼워준다는 미끼도 탐이 났다. 하지만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어서 보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내가 설명했다. 인터넷으로 들어가보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방송에서만 주는 목욕타월은 아마 없을 거라고. 구입 직전 단계까지 갔다가, 지금 있는 수건을 다 버릴 수가 없으니, 어떻게 처리할 건지 한번만 더 생각해보라는 아내 의견에 제동이 걸렸다.


그 다음에 관심을 갖고 본 것은 휴지통이다. 지금 쓰는 휴지통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홈쇼핑에서 파는 물건이 여러모로 편해 보였다. 쓰레기를 담는 비닐 봉지를 어떻게 처리하는 지가 분명하지 않아서 이것도 구입 직전 단계에서 멈췄다.


일요일 아침에는 약속이나 한 듯 여러 채널에서 건강식품을 판매한다. 평일 8시 반에는 주부들이 관심있을 만한 옷이나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아내의 설명으로 각 채널의 주요 쇼호스트들도 알게 되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볼거리가 없으면 홈쇼핑을 기웃거린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내가 부엌살림을 도맡으면서 호르몬 체계에 이상이 생긴 건가? 아니면 나이 들면서 생기는 변화 중의 하나인가. 그것도 아니면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생활이 원활하지 못한 끝에 벌어진 해프닝인가.


아직까지 물건을 구입한 바가 없고, 혼자서 구입할 능력도 없지만 조만간 무언가를 사게 될 것 같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옛말이 사실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현명한 쇼핑을 위해 내가 생각하는 한 가지 원칙을 주문처럼 외워본다.

“싼 물건은 싼 이유가 틀림없이 있고,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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