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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ug 30. 2021

나는 안경 부자다

돋보기와 다초점 안경

나는 안경 부자다. 집에서 사용하는 안경만 네 개다. 외출할 때 쓰는 안경이 두 개 더 있고, 차에 놓아둔 안경도 하나 있다. 합치면 일곱 개나 된다.


이 안경들은 모두 돋보기다. 중년 고개를 넘어 노년 초입에 만나게 되는 복병, 노안. 그 노안에 맞서기 위한 필수템 돋보기. 내가 돋보기를 처음 마련한 게 13~14년 전이다. 오래 돼서 정확한 연도는 잘 모르겠다.


처음 돋보기를 맞출 때 나름 조언을 듣고 2개를 한꺼번에 했다. 그 후에도 몇 년 지나 2개씩 맞췄다. 그러다보니 안경이 점점 많아져서 버리기도 했다. 기본으로 컴퓨터 용과 책 읽기 용으로 1개씩을 두고, 나머지는 화장실에도 두고, 차 안에도 두고 했다.


돋보기를 끼고 나서 불편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해외여행 때였다. 어마어마하게 상세한 정보가 담긴 외국의 지도를 보려면 복잡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후 돋보기를 꺼내 끼고 지도를 봐야 한다. 길에서 이러려면 손이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든다.

프랑스 파리의 관광지도. 왼쪽 아래 부분에 에펠탑 표시가 있다. 오른쪽 아래 100원짜리 동전과 비교해 보면 지도의 글씨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돋보기를 낀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스테르담을 여행할 때 돋보기를 잃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안경점에 찾아들어갔다. 돋보기라는 단어를 몰라서 “glasses for old man”이라 했더니 그래도 알아듣는다. 샘플을 몇 개 보여준다. 가격을 물었더니 내가 끼던 돋보기의 몇 배다. 더 싼 건 없느냐고 했더니, 마트에 가보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트에 가서 안경을 사라고? 짧은 영어의 문제인가 했으나, 그게 아닌 것 같다.


결국 안경점 직원이 추천한 마트에 가보고 나서야 알았다. 한쪽 코너에 돋보기가 좍 진열돼 있었다. 아주 저렴한 돋보기가. 게다가 패션 아이템으로 쓸 만한 디자인이었다. 이것저것 끼어보다가 흰색 테를 하나 골랐다.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가격은 더 마음에 들었다.


여행 끝날 때까지 쓰고 다니다, 집에까지 갖고 왔다. 이 경험으로 나는 돋보기에 관한 편견을 하나 만들었다. ‘돋보기에 많은 돈을 투자할 필요 없다’라는 편견.




몇 년 동안 돋보기를 새로 하지 않고 살았더니, 최근에는 불편함이 커졌다. 올 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동네 안경점에서 두 개는 렌즈를 새로 했고, 하나는 테까지 새로 했다. 새 안경 세 개가 생긴 셈이다. 이 안경점의 젊은 직원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내 눈 상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전에 쓰던 돋보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나는 건성으로 흘려듣고는 아무튼 잘 해 달라고 했다.


며칠 후 돋보기를 찾아 집에 와서 써보니, 아뿔싸! 가장 많이 사용하는 컴퓨터용 돋보기가 예상외로 눈에 잘 맞지 않았다. 다른 두 개의 안경도 직원의 상세 장황한 설명과 달리 전에 쓰던 안경만도 못한 듯 했다. 그래서 결국 유일하게 바꾸지 않고 남아있던 낡은 돋보기를 컴퓨터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돋보기의 용도는 원래 책 읽는 용도였다. 그러니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늘 남아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돋보기들. 차에 놓아둔 비상용 돋보기는 빠졌다.


이 와중에 아내가 몇 년을 벼르다가 다초점 렌즈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시력이 아주 안 좋다. 수십 년 동안 콘택트렌즈를 끼다 5~6년 전부터 안경으로 바꿨다. “당신은 콘택트렌즈 생체 실험용 인간이다”라는 우악스럽고 무지막지한 내 협박의 결과였다. 내 속마음은 렌즈를 너무 오래 끼다가 눈을 다치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그 놈의 말 때문에 아내는 눈은 괜찮지만 마음을 다쳤는지도 모르겠다.


근시가 심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아내는 노안이 왔는데도 돋보기를 끼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가 작년부터는 자기 안경 위에 내 돋보기를 덧끼고는 “우와 잘 보인다”며 감탄을 했다. 안경을 두 개 낀 예쁜 사람. 서글프지만 ‘늙은 날의 초상’이다. 내가 처음 알던 열아홉 살 소녀의 수십 년 후 모습이다.


아내가 다초점 렌즈를 위한 시력 검사를 끝낼 무렵 내가 문제의 안경점에 들어섰다. 문제의 안경점이라 한 것은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 동안의 안경 가격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내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이 판단에는 저렴 그 자체인 유럽 마트의 5유로짜리 돋보기도 한 몫 했다.


아내는 안경을 맞출 때마다 안경에 무지한 남편의 눈치를 봐왔다. 자신의 눈이 매우 안 좋아서 렌즈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설득에 꿈쩍하지 않는 억지스런 남편. 아무튼 이번에는 내가 아무 소리 하지 않기로 하고, 아내는 다초점 렌즈를 맞췄다. 막내 동생의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안경 가격에 내 심장병이 도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경을 맞추고 열흘이 지났다. 아직도 안경점에서는 연락이 없다. 나도 궁금하고, 아내도 궁금했다. 연락을 해보라고 했더니, 오래 걸린다고는 했단다. 막내 동생에게 물었더니 다초점 렌즈 제작은 오래 걸린단다. 며칠 더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아내가 다초점 렌즈를 하던 날 내 컴퓨터용 돋보기를 하나 새로 맞췄다. 낡은 돋보기 테에 렌즈만 바꿔 끼웠다. 아내의 다초점 렌즈 비용에 놀란 가슴이 너무 저렴한 돋보기에 다시 놀랐다. 열탕과 냉탕을 오가려니 심장이 고생이다. 이틀 후 찾아서 써봤는데 초점이 잘 맞아서 눈이 편안하다. 그 안경점에 대한 그동안의 불신이 ‘거의’ 사라졌다.


간혹 어떤 사람은 돋보기를 쓰게 되면서 충격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냥 무덤덤했다. 피해갈 수 없는 일이란 생각 때문일까. 아내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괜찮은 신체 부위마저 나빠졌다"는 말에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소설 같은 일이란 이런 건가보다. 여기까지 쓰고 끝마치려는 나에게 아내가 이야기한다. “방금 안경점에서 연락이 왔어. 안경 다 됐대.” 안경점에서 내가 그 이야기 쓰고 있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지금은 토요일 늦은 오후라 월요일에 가야겠다. 궁금하다, 아내의 다초점 안경이.


*대문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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