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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Sep 13. 2021

패자에게 보내는 위로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 조코비치가 졌다

조코비치가 졌다.


오늘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가 US 오픈 테니스 남자 결승전에서 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지지는 않았다. 2세트가 끝난 현재 세트 스코어 2:0으로 조코비치가 몰리고 있다. 반전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입에 올리기도 싫은 단어인 ‘졌다’는 단어를 앞당겨 썼다.


세르비아의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는 나의 존재조차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패배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지난해부터 한 젊은 가수의 팬을 자처한 아내를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던 나의 행동을 지금이나마 반성한다. 덕후, 입덕, 덕질, 어덕행덕, 굿즈 등 우리 집에서 나오지 않을 법한 단어들을 이야기하던 아내의 심정도 이해한다. 


나는 어제 아침 US 오픈 여자 결승전이 끝났을 때, 남자 결승전의 결과를 단정하고는 오늘 브런치에 올릴 원고도 다 써놓았다. 오늘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아무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리 써놓은 것이다. 


그 원고는 남자 결승전 3세트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살다 보면 예측 못할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그래도 열렬히 응원하던 자의 ‘패배는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진다.’(*)


조코비치의 패배로 나는 지금 이렇게 브런치용 원고를 다시 쓰고 있다. 조코비치가 이길 수만  있다면 이 원고는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의 한계 속에 사는 인간이 시간을 거슬러 무언가를 도모할 수는 없다. 그 불가역성 때문에 한계를 절감하지만 어쩌면 그 한계가 인간의 더 큰 불행을 막아주는지도 모르겠다.




테니스에 관심 없는 사람은 내가 난리를 치고 있는 이 대회(US 오픈 테니스 대회)가 열렸는 줄도 모르거나, 조코비치가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내가 보통 때 쓰는 글이었다면 여기쯤에서 테니스의 메이저 대회가 어쩌고 이번 대회 결승전까지의 경과가 저쩌고 하면서 알량한 정보를 주워 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그래도 이 말 만큼은 해야겠다. 조코비치와 나의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조코비치가 이겼다면 이것은 테니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될 일이었다. 어떤 선수가 메이저대회 4개(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를 모두 우승하는 것을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 몇 년에 걸쳐 달성(커리어 그랜드 슬램)한 테니스 선수도 남녀 통틀어 몇 명되지 않는다.


특히나 한 해에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일은 더 그렇다. 1년에 달성하는 그랜드 슬램을 캘린더 (이어) 그랜드 슬램이라고 하는데 조코비치가 오늘 그 문 앞에서 좌절했다. 캘린더 그랜드 슬램은 남자의 경우 1969년 호주의 로드 레이버 선수(호주 오픈 결승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가 달성한 이래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조코비치는 다닐 메드베데프라는 선수에게 졌다. 아마도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일은 1세기 안에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또 조코비치가 오늘 이겼다면 메이저 대회 최다 우승의 기록도 세웠을 것이다.


모든 스포츠 경기는 승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향해지도록 돼 있다. 패자(敗者)의 이야기는 기담(奇談)이나 후일담, 미담으로나 다뤄진다. 승자에게 갈채와 환호를 보내는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 아니 생물의 세계에서 약하디약한 인간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그 판에 박힌 방법을 뒤집어엎고 싶을 만큼 마음이 불편하다. 


TV를 보고 왔다. 3세트 여섯 번째 게임이 진행중이다. 거의 끝나간다. 조코비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승패가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체력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미 패배가 마음에 들어와 앉았기 때문이다. 승리는 어쩌면 마음으로 일궈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조코비치의 승리를 기대하며 한 가지 계획을 세웠었다. 그가 이번 대회 내내 입었던 라O스O 브랜드의 티셔츠를 사려고 했다. 그 생각을 바꿨다. 앞으로 짙은 청색의 그라데이션 셔츠는 입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글의 마무리를 해야겠다. 


‘승패(勝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말한다. 다 아는 말이다. 전쟁을 하다 보면 이기고 지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승자에게 보내는 축하나 갈채가 아니라 패자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기 위한 말이다. 한번의 패배나 실패에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해보라는 격려와 성원이다. 나도 가끔 떠올리는 말이다. 하지만 말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오늘이 그 날이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로 조코비치를 위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나에게도 별 위로가 되지 않으니까.


다른 글 마무리가 있어야겠다. 박완서 선생의 수필을 떠올리며 ‘조코비치에게 보내는 위로’를 생각했다. 


여기까지 쓰고 글을 끝내려는데 TV 소리가 시끄럽다. 경기가 끝난 줄 알았다. 아니었다. 3세트 스코어가 5:4로 돼 있다. 조코비치가 뒤늦게 따라붙은 모양이다. 화면을 보니 조코비치가 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런데 그가 셔츠를 바꿔 입었다. 흰색으로. 내가 입지 않을 옷이 한 가지 늘었다.


이제 경기가 끝났다. TV를 껐다. 조코비치에게 이긴 뛰어난 메드베데프 선수에게 축하를 보낸다. 


한국 시각으로 2021년 9월 13일 아침 7시 34분.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 조코비치가 졌다.

준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조코비치.



*참람하게도 <님의 침묵>을 원용하였다.


●덧붙여 쓰기 : 내 브런치의 첫 번째 독자인 아내가 자신이 하는 말을 한마디 더 써넣으라고 한다. “자기, 조코씨한테 진심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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