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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Oct 07. 2021

비밀번호 천국, 비밀번호 지옥

‘비밀번호’라는 것이 있다.


비밀번호에 관한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쓰면 나는 ‘라떼’도 아니고 화성인이 된다. 비밀번호는 이미 일상생활의 필수요소가 되었는데 지구인이 그렇게 남의 이야기하듯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비밀번호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만약 여기에서 다이얼 형태의 금고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다시 화성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금고는 건너뛰고 은행 비밀번호부터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은행 통장 비밀번호는 도장을 사용하던 시대에 이미 등장했다. 쓰고 보니, 요즘 10대 애들은 혹시 도장이 무언지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초기에는 지금과 달리 보조적인 수단이었다. 설사 비밀번호를 몰라도 신분을 증명할 수 있으면 인출도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비밀번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직원이 묻고, 고객은 비밀번호를 ‘공개’ 번호로 만들어 알려주고, 직원이 입력하던 일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밀번호에 관하여 글을 쓰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 또다시 경험한 심장의 덜컹거림 때문이다. 남O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반납 날짜를 확인하기 위하여 로그인을 했다. 아이디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엔터키를 쳤다. 순간 화면에 불길한 기운이 스쳐갔다. “로그인 5회 중 1회 실패.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를 다시 확인하세요.(후략)" 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런 메시지를 볼 때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게 된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의 복잡함이 머리부터 시작해서 심장까지 전해진다. 


지금은 이런 세상이다.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몇 회 잘못 입력하면 락(lock)이 걸린다. 은행 CD기를 이용할 수도 없고, 인터넷 뱅킹도 할 수 없다. 포털사이트의 로그인도 횟수 제한이 있는지 모르겠다.


비밀번호의 전성시대가 된 것은 비밀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비밀이 그렇게들 많을까. 현관문 비밀번호부터 시작해서, 스마트폰 화면 잠금장치 비번, 컴퓨터 포털사이트 비번, 인터넷 뱅킹 비번, SNS 비번, 각종 앱 서비스의 비번, 취미생활 관련 사이트 비번 등등. 차분히 정리해보면 아마 1인당 10가지도 넘을 것이다. 나도 비밀번호를 설정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설정해 놓은 비밀번호가 수두룩하다. 




시작 단계의 비밀번호 형태는 단순했다. 이제부터 라떼맨으로 변신한다

나는 1990년대 중반 이메일을 쓰기 위해 포털사이트 ‘유니텔’(은 삼성에서 운영하던 포털로 지금은 없어졌다. 영화 <접속>을 보면 유니텔이 등장한다)에 가입을 하면서 로그인 아이디를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비번도 설정했다. 처음에는 숫자 네 단위도 가능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1111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영문과 숫자를 섞어 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비밀번호 설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더니 더 복잡해졌다. 영어와 숫자, 특수기호를 섞어 써야 했고, 전체 개수를 8개 이상으로 설정하라는 주문이 생겼다. 특수기호 가운데 *등은 제외하라는 요구도 있다. 


이 복잡한 요구를 반영하여 비밀번호를 만들다 보면, 내가 지금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열심히 만든 비밀번호를 까먹거나 헷갈려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지구에서 30년 이상 산 지구인이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비밀번호 입력 오류가 이 글의 출발점이다.



비밀번호를 까먹을까봐 하는 행동이라는 게 이렇다. 달력의 어느 한 쪽에 자신이 사용하는 비밀번호를 죽 써놓는다. 주로 달력 맨 앞 쪽이 된다. 다이어리를 쓸 경우 다이어리 앞쪽 어느 면에 기록하기도 한다. 이렇게 쉽게 들키는 게 과연 비밀번호일까 의심이 생기지만, 잊어버려서 겪는 불편함을 생각하면 어디엔가 기록해 놓는 것이 ‘안전’하다. 나처럼 핸드폰의 메모장에 비번을 써놓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이쯤되면 비밀번호의 순기능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역기능만 남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헤어나오기 어렵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가 아니라, 비밀번호 지옥에 빠진 라떼가 된다.


끝으로 비밀번호가 안전을 보장하고 신변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초등학교 3학년 쯤 되는 사내아이와 함께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바로 밑의 층에 사는 아이다. 내가 층 버튼 누르는 것을 보고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그 아이가 한 층 먼저 내렸다. 나는 물끄러미 집 문 앞에 선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자기 집 문 열쇠를 몸으로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 왼손으로 번호판을 가린 후 오른손으로 아무도 못 보게 번호를 누른다. 


물론 복도에는 아무도 없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기면서 목격은 끝이 났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내가 어떻게 보였길래 저 아이는 저렇게 온몸으로 번호 누르는 모습을 가리는 것일까. 부모의 철저한 교육이 먼저 떠올랐고, 이어서 옛말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지키는 사람 열 명이, 도둑 한 명을 막지 못 한다.” 


치매와 비밀번호의 상관관계를 걱정하는 라떼맨은 비밀번호 시대를 이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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