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엘 상권>에서 왼손 연습곡 두 곡을 마친 나는 기세 좋게 양손 연습곡을 치기 시작했다.
양손 연습곡도 어렵지 않았다. 양손이라고는 해도 한 마디에 온음표(4분음표♩×4) 하나씩만 들어있는 악보는 너무도 쉬웠다. 한마디에 2분음표(4분음표♩×2)가 두 개 등장하는 악보도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 레슨까지 순항은 계속됐다. 나는 수십 년 만에 공부하는 재미와 성취감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오래 계속되는 법이 있던가.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른손은 온음표, 왼손은 4분음표 4개, 그러다가 오른손은 4분음표 4개, 왼손은 온음표 한 개 로 번갈아 바뀌는 13번곡이 등장했다. 오른손 한 개의 온음표가 2분음표 두 개로 ‘분화’하는 마디에서 잠시 주춤했다(왜 나는 이때 생물시간에 배운 세포의 분화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쯤이야. 자신감을 회복하자 점2분음표+4분음표 한 개로 바뀌는 마디도 어렵지 않게 돌파했다. 14번과 15번을 무사히 쳐냈다.
그런데...
이건 뭐지?
한 마디에 4분음표 2개와 2분음표 하나뿐인 16번곡이 뭔가 이상했다. 2/4박자 곡이라 그런가? 쉽게 쳐내지를 못 하겠다.
<바이엘 상권> 양손 연습곡 16번
오른손은 단순하다. 도미 레파 미도 레 도미 레파 미레 도. 레미 도솔 파미 레 도미 레파 미레 도. 왼손은 더 단순하다. 도 솔 도 솔파, 미도 파레 솔.
문제는 양손을 한꺼번에 합쳐서 연주하는 것이다. 도미/미도 레파/파레 미레/솔 도/도미...
내 머릿속은 콩나물 봉다리 속의 콩나물들처럼 음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씻으려고 봉다리를 열어보니 꼬리가 길게 늘어진 콩나물도 있고, 머리가 떨어져나간 콩나물도 있고.
이 곡에서 처음으로 별을 받았다. 벌이 아니라, 별을 받았다. 피아노 선생님은 레슨에서 내가 실수한 부분에는 별표를 한다. 다음번에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시 해보라는 뜻이다. 그러니 피아노 수업의 별은 벌(罰)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세 번째 시간에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았다.
16번 곡 세번째 줄에 별이 등장했다. 중앙 왼쪽에 흐릿하게 빛난다.
실패 후 맞은 주말에 나는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 만든 듯한 사자성어(四字成語) ‘작심삼일’을 떠올렸다가 박박 지워버렸다. 아내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대학에 떨어진 것과 피아노를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재수를 안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실상은 이보다 더 심한 내용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한동안 피아노 연습을 했더니 피곤했다. 좀 쉬어야겠다며, 아내와 함께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카페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는 나를 아내는 또다시 옆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까짓 눈길쯤은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이상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재수 안 했을 거 같은데...’
주말을 넘기고도 연습을 계속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심정으로 5일간 연습을 거듭했다.
드디어 다음 레슨을 받는 날.
내 노력이 완전히 빛을 발하지는 못 했다. 16번 곡 점검 연주(*)에서 한 군데가 틀렸다. 별표 한 곳이 아니었다. 별표 부분은 통과하고(**), 연습 때는 틀리지 않던 부분이 틀렸다. 이런, 바보같으니... 그래도 간신히 통과를 했으니 다행이었다. 이어지는 17, 18번도 무사통과. 그렇게 첫 번째 위기를 넘겼다.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끝이 뭔가 시시하다고? 현실은 실제로 이랬다.
*점검 연주 : 바이엘 상권을 연습하는 주제에 ‘연주’라는 단어를 쓰자니 몹시 민망하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연주라고 칭했다. ‘점검 (피아노) 치기’라고 하려니까 북한 말 같기도 하고,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다.
**별과 벌 : 잘 되지 않던 별표 부분을 연습하다가 꾀를 내보았다. 선생님이 연필로 표시한 별을 지우개로 지우는 거다. 그러면... 하고 생각하다가 실행은 하지 않았다. 일곱 살 짜리도 안 할 생각을 오십 후반에 하고 있다니. 그 생각 때문에 벌을 받아서 다른 부분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