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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Oct 25. 2021

피아노를 배우다가 철학을 하다

피아노 배우기(5)

<어린이 바이엘(상권)>에 나오는 연습곡은 두 종류다. 쉽거나, 혹은 어렵거나. 중간은 잘 느끼지 못하겠다.


난이도를 수치로 정확히 표시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중간이 존재할 것이다. 난도(難度) 10, 혹은 난도 2, 혹은 난도 5처럼. 난도 10은 물론 고난도이고, 5는 중간, 2는 쉬운 것이다. 그럼에도 쉽거나 혹은 어렵거나 두 가지라고 한 것은 내가 피아노를 칠 때 느끼는 감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또한 틀리지 않고 연주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도 그렇다.


쉬운 곡은 불과 두세 번 만에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해낼 수 있다. 당연히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반면 어려운 곡은 쉬운 곡의 몇 배나 시간이 걸린다. 어려운 곡은 20번, 30번을 연습해도 자꾸 틀린다.


그렇다면 그 중간인 10번쯤 걸려서 완성되는 곡은? 별로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16번은 어렵다에 해당한다. 반면 17번은 쉽다이다. 16번보다 뒤에 나온다고 해서 꼭 어렵지는 않다. 여기에 ‘희망’의 씨앗이 있다.


18번부터 21번은 쉽고, 22번은 어렵다. 오래 전에 친 거라서 기억과 느낌이 가물거릴 수 있다(그래서 다시 쳐본 즉... 20번은 중간 정도의 어려움이다.) 다행인 것은 ‘어렵다’가 연거푸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도전 의지가 강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피아노 배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바이엘 상권을 만든, 혹은 편집한 사람의 의도가 잘 발휘되고 있는 셈이다.


<바이엘(상권)> 양손 연습 21~22번


이러다보니, 쉬운 곡이 나온다고 희희낙락하지 않는다. 어렵다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히말라야의 고봉을 오르는 산악인처럼 한발 한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써놓고 보니 나 자신에 대한 미화가 너무 심해진 듯하다).


쉬운 곡이라 해도 한 군데도 안 틀리고 연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방심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어려운 곡을 틀리지 않고 연주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자니 연습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못 할 것 같다’는 생각도 수시로 든다.


하지만, 계속 연습하다보면 ‘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특히나 맨 처음 그 곡을 접했을 때의 막막함과 현재의 가능성을 비교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된다. 이것은 <바이엘>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체르니나 그보다 더 어려운 곡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는 모습도 그렇지 않던가. 매일 어려운 일만 반복되는 삶은 흔치 않다. 쉽다고 방심할 수 없고, 어려우면 당연히 용을 써야 하고. 이래서 살아간다는 일이 녹녹치 않다.


나이 들어 스스로 배우겠다고 나선 사람도 이런데 어린이들은 어떨까.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원해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엄마나 아빠의 요구에 응해서 배우지 않는가 싶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부담감에, 어려운 것을 해내야 하는 부담감까지. 이때 어떤 엄마는 한 곡을 잘 치면 그때마다 무언가 보상을 해주기도 한단다. 강아지 훈련시키는 것 같아 조금 언짢을 수도 있겠지만 선의로 받아들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다. 별로 그렇지 않다. 의무감이 없으니 그런 모양이다. 잘 되면 좋고, 안 돼도 좋은 취미를 익힌 정도는 되니까 말이다.


목표를 한 가지 정해놓은 것도 도움이 된다. 두 곡을 1년 내에 연주하겠다는 목표 말이다. 달성하지 못 하면? 할 수 없지. 조금 더 노력해야 되겠지. 나도 1년 후에 내가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이건 피아노를 배울 그 당시의 생각이었다). 목표로 잡은 두 곡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 곡들은 쉽다와 어렵다로 나눠보면 틀림없이 어렵다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연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끝도 없는 반복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반복’을 계속 생각하다 보니 시지프스(*)가 떠올랐다. 카뮈가 쓴 <시지프스의 신화>는 어쩌면 카뮈가 피아노를 배우면서 얻은 아이디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다. 얼마 전 다시 그 책을 읽어보았는데, 지금 비교해보니 피아노보다 훨씬 어려웠다. 완독했느냐고? 만약 안 읽어보았다면 당신이 직접 한번 도전해 보라. 책은 아주 얇다.


* 시지프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시지프스(Sisyphos)는 표기가 복잡하다. 오랫동안 시지프스로 표기해 왔기 때문에 번역본의 제목은 거의 다 <시지프스의 신화>로 표기돼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970년대말 범우에세이문고의 제목은 <시지프의 신화>다. 하지만 요즘 표기법은 ‘시시포스’다.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시지프스를 검색하면 “시지프스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고, 시시포스를 찾아가면 그 설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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