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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Nov 01. 2021

손열음을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를 읽고 / 피아노 배우기(6)

독일의 하노버라는 곳에서 편지가 왔다. 수신자는 나를 포함하여 여러 명이다. 발신자는 손열음이다. 맞다. 나도 알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글은 흔히 그 사람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 사람의 인간됨과 성품이 글을 통해 어떻게든 드러난다는 말일 게다. 나는, 손열음이 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한다. 


더 끌고 가지 말고 여기서 설명을 마치고 글을 이어가야겠다. 손열음이 2015년에 펴낸 수필집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를 읽고 있다. 책 제목이 그러하니 나에게 쓴 편지라고 우겨도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하.


손열음과 <음악편지>를 떠올린 것은 내가 피아노를 배우고 있고, 이 브런치에 피아노 학습과정을 글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늘지 않고, 어려움만 계속 되는 피아노 배우기. 손열음 같은 피아니스트는 이 과정 혹은 이런 순간을 과연 겪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겪었다면 어떻게 넘어갔을까도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피아노 배우기 과정 ‘좌충우돌 학습기’가 과연 말이 되는지도 알고 싶었다. <음악편지>를 읽고도 그에 대한 답을 대부분 얻지 못 했지만 나는 손열음이라는 음악가, 피아니스트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되는 기대 밖의 소득을 얻었다. 어쩌면 원래의 기대보다 더 큰 소득인지도 모르겠다.

손열음이 쓴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손열음은 <음악편지>에서 클래식 음악가들의 생애와 그 음악가들이 작곡하고 연주한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음악가들이 겪은 삶의 고뇌와 기쁨, 희망과 좌절을 들려준다.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음악이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의미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게 된다. 한참 읽다보면 어떤 때는 작가의 콧노래를 따라 부르는 듯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좋은 연주를 들을 때의 기쁨과 좋은 글을 읽을 때의 행복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글에서 언급하는 곡들을 들으면서 읽다 보면 읽는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손열음은 피아니스트다. 내가 피아노를 치기 전까지 손열음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것이 거의 전부였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후에는 조금 달라졌다.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유튜브를 통해 여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접했다. 손열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세기의 인물인 쇼팽과 멘델스존, 리스트야 유튜브에서 볼 수 없지만 현대 음악가들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부터 다니엘 바렌보임, 마르타 아르헤리치,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리아 조앙 피레스 등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건우 선생을 비롯해 임동민•동혁 형제, 김선욱, 선우예권,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빼놓기 어려운 조성진까지. 이들과 함께 언급할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이 손열음이다.


지금 내가 언급한 피아니스트들이 무슨 순위에 따라 점수가 매겨져서 언급된 것은 아니다. 국제적인 콩쿠르 입상을 통해 명성을 쌓기 시작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피아노 독주와 세계적인 연주 단체와의 협연을 통해 그 명성을 키워 나간 존재들이다. 실력과 명성을 사람들이 선호하면서 유튜브라는 새로운 매체에 등장했고 내가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음악가들이 중요성이 덜 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빠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꼭 언급해야겠다. 오해가 없도록.


내가 손열음을 좋아하는 이유를 들으면 전문가들은 거의 모두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연주자들은 연주하면서 종종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다. 수십 분에 걸쳐 연주하는 동안 틀려서는 안 된다는 긴장감이 자신을 옥죄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 최고조로 고양된 자신의 감정을 청중들에게 전달하려 애쓰다 보니 생기는 표정일 것이다. 


손열음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몰입하되, 고뇌하는 표정보다는 즐겁고 기쁘게 연주하는 느낌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예가 설명을 도와줄 수 있을까. 부모는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지만 며칠 째 잠도 거의 안 자면서 너무 열심히 공부하다 코피까지 흘릴 지경이 되면 “이제 그만하고 좀 자라”하게 되지 않을까. 연주자들의 고뇌에 찬 연주 모습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종종 그랬다. 이에 비하면 손열음의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분명하고 공부도 아주 잘 하지만 쌍코피를 쏟아가면서까지 열심히 해서 부모님의 마음에 무거움을 안겨주는 것은 아닌... 내가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피아니스트를 좋아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모습도 보았다. 한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중간에 보았기 때문에 왜 출연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행자가 연주를 부탁했다. 앞에 놓여있는 악기는 디지털 피아노였다. 부탁을 받았을 때 손열음은 당황했다. 디지털 피아노라는 것을 처음 친다고 했다. 나는 진행자의 부탁이 무리하다고 생각했다. 손열음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손을 좀 풀어도 괜찮겠느냐”고 묻고는 연습삼아 잠깐 건반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폭풍같은 연주를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이었다. 흔히 <터키행진곡>이라고 하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곡이다. 폭풍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그런 연주였다. 


나는 이때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 피아노가 아니면 연주할 수 없다는 전문 연주자들의 전문성과 자긍심을 떠올렸다. 이 사람들의 입장과 비교하면 손열음은 전문가도 아니고 자긍심도 없는 연주자다. 바로 앞의 문장은 나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손열음은 음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늘 사람 생각도 하는 듯하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 손열음의 모습을 유튜브에서 본 적 있다. 그의 재능을 아주 잘 보여주는 연주 모습이다. 아마도 그가 청소년일 때 연주한 화면으로 생각한다. 장소는 세종문화회관이다. 디지털 피아노로 연주한 것과 같은 <터키행진곡>이다. 모차르트의 곡을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편곡한 곡이다. 


이 연주에서 손열음은 이른 바 속주(速奏. 빨리치기)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같은 연주 무대에 있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손열음을 쳐다보며 경탄하는 표정이 이날의 연주가 어떠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손열음이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한 이력도 대단하지만, 그 정보는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으니까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편지로 시작한 이 글에서 편지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연주는 연주고, 그의 글도 또한 일품이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의 수필을 통해 본 손열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열정이 느껴지지만, 끓어 넘쳐서 읽는 사람에게 부담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습에는 지적인 느낌이 충만하다. 


로베르트 슈만이 후에 결혼하게 되는 클라라 슈만에 대한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작곡한 <Fantasie Op.17>에 대한 묘사의 일부다.

“p(피아노)로 숨을 죽인 왼손이 무색하게 오른손의 선율이 ff(포르티시모)로 등장한다. 일곱 마디 내내 거침없는 어조로 노래하는 동안 왼손은 똑같은 베이스 솔을 계속 유지한다. 어떤 것에도 괘념치 않는 그의 마음과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는 그녀…. 오른손이 작게 속삭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베이스도 라로 한 음 올라가 단조 화성을 만들고 그 불안감에 동조한다. 서로 주저하는 듯한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를 거쳐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 온 선율에, 이번에는 트릴(연속 꾸밈음)이 더해진다. 처음에는 그 모양새가 사랑을 속삭이는 새의 지저귐같이 고요하지만 점차 그 폭이 커지고 이내 광기로 치닫는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132~133쪽). 

음악에 대한 묘사는 이렇게 하는 것인가 보다. 


한 문장만 더 써야겠다. 나는 손열음의 책을 읽으면서 그가 피아노와 음악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 인간을 사랑한다고 느낀다.

내가 쓰는 이 글의 결론은 시작할 때 이미 정해져 있었다. 손열음은 도대체 한 곡의 연주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연습을 하는 것일까. 나의 이 의문과 나름대로 예상하는 답은 피아노를 연습하며 매일 실망하는 나 자신에게 희망을 준다. ‘나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손열음 만큼 열심히 연습하면 조금 더 잘 하게 될 거야. 손열음처럼 피아노를 위해 태어난 사람도 연습을 엄청나게 했을 텐데 네가 무슨 배짱으로 연습도 안 하고 잘 치기를 바라느냐.’


자, 이제 글을 쓰는 시간은 끝났고 피아노 연습을 할 시간이다. <터키행진곡>은 조만간 연습하기로 하고, 오늘은 요즘 계속 연습하고 있는 파헬벨의 <캐논>을 이어서 연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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