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데렐로 Nov 15. 2021

부러움과 치기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 / 피아노 배우기(7)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오르간을 잘 치지 못하셨나보다. 음악수업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누가 반주할래?” 하며 자원자를 기다렸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한반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공부했다. 여학생들은 서로 체르니 몇 번을 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네가 해라” “네가 해라” 하며 양보 아닌 양보를 거듭했다. 결국 그 가운데 한 명이 마지못해 한다는 표정으로 반주를 하고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뻐기듯 했다가는 요새말로 왕따를 당할 테니까. 내가 피아노를 쳐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의 첫 번째 기억이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 녀석과 광화문을 걷고 있었다. 그 당시는 광화문에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음악사 앞을 지나가다 친구가 말했다. “저 악보 하나 사주라.”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Ballade Pour Adeline)’라는 악보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쓰이는 등 인기가 많았던 곡이다. 몇 백 원 쯤 했던 것 같다. 나는 악보를 사서 친구에게 선물했다. 왜 “네가 사라, 그 악보”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2년 넘게 연습중인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악보. 언제 제대로 칠 수 있을지 몰라서 악보를 코팅해 놓았다.


몇 달 후 그 녀석을 만났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기가 그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단다. 신입생 환영회가 끝난 후 그 학교 그룹사운드(당시는 대학가요제와 그룹사운드의 전성시대였다.)의 리더가 내 친구에게 그룹사운드에 들어오라고 했단다. 그룹사운드의 이름은 활주로였고, 그 선배의 이름은 배O수였다. 그 친구는 몇 년 후 대학가요제 본선에서 키보드를 맡았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싶게 만든 두 번째 기억이다.


텔레비전 PD로 일하던 나는 스튜디오 안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부조정실에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녹화가 없어서 어두운 스튜디오 한 구석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동료 PD가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연주곡들을 연거푸 연주하고 있었다. 그가 피아노를 친다는 걸 모르던 나는 조금 놀랐다. 부럽기도 했고. 세 번째 기억이다.


건맨 NO, 피아니스트 YES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서 여러 가지로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조사弔辭를 읊는 느낌이다. 그는 아직 정정하게 살아있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등 마카로니 웨스턴이라 불리는 B급 영화 배우로 시작해 <더티 해리>에서 거친 형사 역으로 이름을 날리더니 나중에는 뛰어난 배우를 넘어 세계적인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나무위키에서 캡처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프로필. 배우, 감독, 작곡가, 음악가... 이럴 수도 있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가 영화음악도 직접 담당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있으며, 피아니스트로도 나름 뛰어나다는 것을. <사선에서>. 영화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리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다. 감독은 볼프강 피터슨(요즘은 볼프강 페터젠 이라고 표기하는 모양이다)이다. 음악은 엔리오 모리코네. 그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퇴물’ 대통령 경호원이다. 암살 위협 정보를 접하는 바람에 퇴역에서 다시 현역이 된다. 하지만 나이를 속이지 못해 허덕댄다. 


힘든 하루를 마친 어느 날 저녁 그가 바(bar)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피아노로 재즈곡을 연주한다. 그가 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후에 한번 더 등장한다. 이 모습 때문에 다시 한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 기억에 남았다.(*) 지친 삶을 스스로 위로하는 피아노 연주.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기억의 마지막이다. 


써놓고 보니 내가 피아노를 배우려는 이유를 종합하면 ‘부러움과 치기(稚氣)’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 나이 들고 사람들 눈치 덜 봐도 돼서 좋은 점이다. 그리고 뒤로 미루기에는 나도 나이가 꽤나 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감독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와 <미스틱 리버> <밀리언달러 베이비> 등의 영화음악을 직접 담당했고, 그 외 여러 영화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거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와 영화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감독. 겉은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바게트가 생각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손열음을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