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 / 피아노 배우기(7)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오르간을 잘 치지 못하셨나보다. 음악수업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누가 반주할래?” 하며 자원자를 기다렸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한반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공부했다. 여학생들은 서로 체르니 몇 번을 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네가 해라” “네가 해라” 하며 양보 아닌 양보를 거듭했다. 결국 그 가운데 한 명이 마지못해 한다는 표정으로 반주를 하고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뻐기듯 했다가는 요새말로 왕따를 당할 테니까. 내가 피아노를 쳐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의 첫 번째 기억이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 녀석과 광화문을 걷고 있었다. 그 당시는 광화문에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음악사 앞을 지나가다 친구가 말했다. “저 악보 하나 사주라.”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Ballade Pour Adeline)’라는 악보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쓰이는 등 인기가 많았던 곡이다. 몇 백 원 쯤 했던 것 같다. 나는 악보를 사서 친구에게 선물했다. 왜 “네가 사라, 그 악보”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 달 후 그 녀석을 만났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기가 그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단다. 신입생 환영회가 끝난 후 그 학교 그룹사운드(당시는 대학가요제와 그룹사운드의 전성시대였다.)의 리더가 내 친구에게 그룹사운드에 들어오라고 했단다. 그룹사운드의 이름은 활주로였고, 그 선배의 이름은 배O수였다. 그 친구는 몇 년 후 대학가요제 본선에서 키보드를 맡았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싶게 만든 두 번째 기억이다.
텔레비전 PD로 일하던 나는 스튜디오 안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부조정실에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녹화가 없어서 어두운 스튜디오 한 구석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동료 PD가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연주곡들을 연거푸 연주하고 있었다. 그가 피아노를 친다는 걸 모르던 나는 조금 놀랐다. 부럽기도 했고. 세 번째 기억이다.
건맨 NO, 피아니스트 YES…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서 여러 가지로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조사弔辭를 읊는 느낌이다. 그는 아직 정정하게 살아있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등 마카로니 웨스턴이라 불리는 B급 영화 배우로 시작해 <더티 해리>에서 거친 형사 역으로 이름을 날리더니 나중에는 뛰어난 배우를 넘어 세계적인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가 영화음악도 직접 담당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있으며, 피아니스트로도 나름 뛰어나다는 것을. <사선에서>. 영화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리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다. 감독은 볼프강 피터슨(요즘은 볼프강 페터젠 이라고 표기하는 모양이다)이다. 음악은 엔리오 모리코네. 그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퇴물’ 대통령 경호원이다. 암살 위협 정보를 접하는 바람에 퇴역에서 다시 현역이 된다. 하지만 나이를 속이지 못해 허덕댄다.
힘든 하루를 마친 어느 날 저녁 그가 바(bar)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피아노로 재즈곡을 연주한다. 그가 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후에 한번 더 등장한다. 이 모습 때문에 다시 한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 기억에 남았다.(*) 지친 삶을 스스로 위로하는 피아노 연주.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기억의 마지막이다.
써놓고 보니 내가 피아노를 배우려는 이유를 종합하면 ‘부러움과 치기(稚氣)’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 나이 들고 사람들 눈치 덜 봐도 돼서 좋은 점이다. 그리고 뒤로 미루기에는 나도 나이가 꽤나 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감독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와 <미스틱 리버> <밀리언달러 베이비> 등의 영화음악을 직접 담당했고, 그 외 여러 영화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거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와 영화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감독. 겉은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바게트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