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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Feb 22. 2021

중국음식점의 칼잡이 소년

주방 일을 시작하고 나서, 새롭게 생겨난 갈망이 있다. 칼질을 잘하는 방법은 도대체 무얼까. 손을 베지 않고 그 방법을 터득할 수는 없을까.


몇 년 전 놀라운 칼질로 TV 요리 프로그램에 등장해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중국음식 요리사가 있다. 요즘은 그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지만, 그의 칼질은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요리 좀 한다하는 요리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칼솜씨를 자랑한다. 여러 차례 손을 벤 경험이 없었다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들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뛰어난 칼잡이는 따로 있다. 1980년대 초반. 여러 대학 학생들이 함께 모이는 동아리 모임에 나갈 때다. 모임이 끝난 후 자주 들르던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시장통 2층에 위치한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 중국집이었다. 짜장면이 500원이었다. 호랑이도 담배 피고, 나도 담배 피던 옛날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몇 명이 함께 중국집에 들렀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인 듯했다. 아주 추운 날이었고, 방이 뜨듯하다기에 방에 들어가 앉았다. 짜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따 다 다 다 다 다. 다다다다다다다. 


예사롭지 않은 칼질 소리에 방문을 빼꼼 열고 내다보았다. 홀에는 한 소년이 테이블 위 도마에서 단무지를 썰고 있었다. 다음 날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략 열두세 살 정도 된 소년이었다. 


입성이 너무 꾀죄죄해서 안타까웠고, 칼질이 너무 빨라서 놀라웠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칼이었기에 두려움도 생겼다. 단무지 몇 개를 순식간에 썰어버린 소년은 이번에는 단무지 두 개를 도마 위에 나란히 놓았다. 요란한 도마 소리는 사라지고 생소한 정적이 자리 잡았다. 


무얼 하나 하고 쳐다보는데, 써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무에다 칼을 긋기 시작했다. 썰기만 하는 것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자르는 것만큼 빠르게 단무지 두 개를 동시에 그어 제끼는 그의 칼솜씨... 말 그대로 말을 잊게 만드는 솜씨였다. 


몇 개의 단무지를 그어버리더니 다시 단무지를 두드렸다. 정적 뒤에 이어지는 요란한 도마 소리와 함께 짜장면이 나왔다.



그 소년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게 갈무리되었다. 사람이 도를 통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어김없이 그가 생각났다. 내가 노력하기 싫을 때도 한번쯤 그 소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칼로 무언가를 할 때면 수시로 그가 생각났다.


요즘 부엌일을 하고 나서는 더 자주 그가 생각난다. 나보다 일고여덟 살 아래니까 지금쯤 오십이 넘었을 것이다. 중국음식점을 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일을 할까. 그러기엔 칼솜씨가 너무 아까운데.


파를 썰거나, 무를 썰 때면 가끔씩 소년의 칼솜씨를 흉내내본다. 다다다다 소리가 나게 칼을 두드려 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겁이 너무 많다. 이제껏 크게 베지 않은 것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라면서 스스로를 칭찬해본다. 그래도 칼잡이 소년의 선연한 기억은 약해지지 않는다. 그는 내가 아는 제일 어린 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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