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 해가 간다
성탄절 전날 저녁 손을 베었다. 식칼도 과도도 아닌 빵칼에 손을 베었다. 냉동에서 꺼낸 베이글을 자르려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발단은 부실한 저녁이었다. 그날 우리 부부는 저녁식사를 대충 때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배가 고프다며 무언가를 먹겠다고 했다. 때가 때인지라 선심이 발동한 나는 베이글을 구워주겠다며 나섰다.
먼저 베이글을 해동한 후 잘라야 하는데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돌처럼 딱딱한 베이글을 자르지 못한 칼은 빵을 비껴올라가다가 내 왼손의 검지를 베고 말았다. 한 시간 가까이나 누르고서 피가 멎었으니 아주 간단한 상처는 아니었다.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을 겪을 때 생각이 많아진다. 부실한 저녁식사의 선행 요소인 점심식사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우리 부부는 그날, 성탄절 전날이니까 좀 그럴 듯한 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탐이 별로 없는 편인데도 과식을 했다. 그래서 저녁은 간단히 하자고 했다. 그 뒤 끝에 벌어진 일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나는 애꿎은 ‘변방 노인의 말’〔塞翁之馬. 새옹지마〕을 소환했다.
점심을 평소처럼 먹었더라면...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었다면...
베이글을 자를 때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화를 피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와 나눈 대화도 떠올랐다.
“당신은 올해 뭐가 제일 힘들었나?”
“특별히 힘들었다고 할 만한 게 없는데.”
“운 좋은 한 해였네. 나는 책 펴내느라 조금 고생을 했지만 그건 나 좋자고 한 일이었으니 고생이라 할 수 없겠고.”
“그렇지.”
“정기 진료 때문에 병원을 꽤나 드나들었지만 입원할 일 없었으니 평온한 해라고 해야겠지.”
이때 저녁 빵칼 사건의 씨앗이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뭔가 안 좋은 일을 기획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밥을 많이 먹게 한 후, 저녁을 대충 먹게 하고, 그 다음에 배가 고파지면 냉동고의 베이글을 떠올리고...
우연으로 몰아나가면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게 우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과관계로 연결지으면 시작부터 끝까지 상호 연결이 될 수도 있겠다. 더 이상 비약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정리했다.
이렇게 한 해가 간다. ‘이렇게’ 라는 단어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성찰과 후회가 담겨 있다. 말이 좋아 성찰이지, 성찰보다는 후회가 많을 것이다. 꼭 집어 말 할 수 없는 많은 일들 가운데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고 후회되는 그런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시간이 이맘 때 쯤일 것이다.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난 후만 따져 봐도 삼십 몇 해를 보냈는데 늘 그렇다.
한 순간 한 순간, 어떤 상황,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면 늘 ‘이렇게 한 해가 간다’는 생각을 한다. 미성숙해서라기보다는, 삶에 완성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평온하고 좋은 한 해였다고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일과 감사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단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 표현을 하도록 하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꼭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살라고 ‘이렇게 또 한 해’가 간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빵칼에 손을 벤 일로 생각이 사방팔방으로 번져나갔다. 그 끝에 선하게 살려는 의지가 자리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렇다, 연말이라 다시 한 번 생각하는데 선한 마음은 언제나 옳다, 마치 치킨처럼.
***브런치 작가님들과 독자분들 모두 새해에 행복하세요.***
*사진 출처 : 신데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