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 준비법_김용임의 <내장산>
분명 아침이다.
눈꺼풀은 무겁고 마음은 아직 눅진하다.
출근길엔 커피보다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럴 땐 내 비타민, 김용임의 <내장산> 재생.
“동녘바람 불어오면 곱게 물든 내장산아~~~”
이 한 소절이면 된다.
그제서야 차창 밖 하늘이 투명해지고,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도 '좋은 아침~'인사를 건넨다.
내장산으로 출근하는 기분이랄까.
기분을 좋게 만드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음악은 단순히 듣는 게 아니라, 내 하루를 리셋하는 버튼 같다.
오늘 아침에도 ‘내장산 노래 진짜 좋다’에서 시작해
‘인생은 아름다워~’로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극F다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김용임의 노래를 듣다 보면 목소리의 시원함보다 먼저,
그 안에 스며 있는 말맛에 자꾸 마음이 머문다.
<내장산>의 백미는 우리 말글이 빚어낸 한국의 가을이다.
내장사 쇠북 소리, 밤새도 둥지를 찾아 날개를 접는다.
가을빛 물들면 애기단풍 지면은 찾아올거나,
어느 고운 임 나를 찾아올거나 내장산으로
고요했던 절집이
가을철 손님들을 맞으며 살짝 들뜬 숨을 고르는 듯하다.
바람이 단풍잎을 스치고, 망부석의 그늘 아래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달빛에 젖어 있다.
이보다 더 따뜻하고, 더 쓸쓸한 가을 풍경이 있을까.
아직 내장산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그 산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애기단풍, 법당 앞 댓돌, 쇠북소리, 가을 달빛—
그 소담스런 우리말이 김용임의 목소리를 만나
한 폭의 가을풍경이 된다.
김용임의 무대에는 언제나 질서가 있다.
정갈하게 시작해, 절정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내장산>의 첫 소절을 내뱉는 순간,
그의 호흡과 눈빛, 손끝의 움직임까지 정확히 박자를 계산한다.
여러 후배 가수들이 오디션에서 이 무대를 재현했으나, 많이 부족했다고 느껴졌다.
지나치게 흥에 겨워 있거나 과한 기교와 애교로 화려함의 정도를 넘어버려서다.
어쩔 수 없다. 못따라간다. 김용임의 깊이는.
<부초 같은 인생>에서는 인생의 무게를,
<비익조>에서는 사랑의 숭고함을,
<사랑님>에서는 그리움의 결을 노래했다.
어떤 곡이든 목소리의 힘만으로 장면을 만든다.
김용임의 트로트는 ‘유행가’가 아니라 ‘작품’에 가깝다.
후배 가수들이 “노래로는 절대 못 이긴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가 노래할 때 관객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노래로 응축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공백기를 지나 다시 무대에 선 지금도,
김용임은 여전히 트로트의 중심에 서 있다.
후배들의 존경과 동료들의 존중을 동시에 받는 가수.
무대 위에서 그는 언제나 ‘어른의 품격’으로 존재한다.
듣다 보면 궁금해진다.
도대체 내장산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이런 가사가 나왔을까.
찾아보니 과연이었다.
호남의 금강산,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깊은 산세와 붉은 단풍, 고즈넉한 사찰이 어우러진 풍경.
해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가을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니,
언젠가 꼭 그 계절 속에 서보고 싶다.
요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인생의 가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묻는다면
내장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법당 앞 댓돌 위의 새하얀 고무신처럼
자신만의 고유함과 단단함을 지키며,
때로는 애기단풍을 쓱 펼쳐내어 조용히 미소를 흩뿌리는 사람.
누군가의 하루를 잠시나마 환하게 비춰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내 마음의 내장산에 가을이 물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