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깍지대신 손깍지

주말부부일기 #12 - 강원 춘천 오봉산

by 씬디북클럽



모처럼 주말 등산을 나섰다.

강원도 춘천시 오봉산이다. (779m)



"5분만 더, 10분만 더..."


노 알람 모닝 달콤한 주말 아침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잠은 차에서 자면 되지. 2시간을 달게 잤더니 강원도 배후령 정상, 어느새 해발 600m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직 아침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 등산화를 조이고 앞섶을 여미고 출발...


... 하자마자 약 50도의 경사가 눈앞에 떡 하니 등장했다. 단단한 로프를 단단히 잡고 오르는 데도 저절로 말이 없어지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오른쪽 종아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준비 운동도 없이 시작한 게 무리였을까. 아직 차가 저 아래로 보이는데 차키를 받아 들고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할까...라고 하려는 순간 뒤편의 등산객 한 무더기가 치고 올라온다.


"허허, 천천히 가슈.

우리는 나이 먹어서 빨리빨리 못 올라간당께."


빨리 가라는 거야, 정말 천천히 가도 된다는 거야. 길을 내어드리고 천천히 다시 숨을 골랐다. 다시 발걸음을 내딛다 보니, 10여 분도 채 되지 않아 1봉에 도착했다. 오호, 할 만하네.




4월 초부터 내내 십보일꽃였다. 마음을 내내 빼앗겼다. 4월 중순의 봄산은 연둣빛 물감을 짜서 물에 풀어내는 중이었다. 눈높이에 연분홍빛 꽃들이 보였다. 안녕, 너는 진달래니 철쭉이니. 눈 아래에 노란 꽃 보라꽃도 보였다. 안녕, 너는 애기똥풀 같고, 저는 제비꽃 같은데 맞니? 꽃을 좋아만 하지 정확한 이름조차 모르겠다. 나는 꽃과 하늘을, 그는 돌과 나무를 보며 감탄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달랐지만 걸음은 한 곳으로 내딛다 보니, 오호라, 벌써 2봉이다. 벤치도 있다. 친절한 산이네.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 두유를 꺼냈다. 단맛 하나도 없어 냉장고에 쌓여 가던 두유는 맑은 공기와 함께 하니 쑥쑥 들어갔다. "나는 그거 좋아해, 그거 감자랑 계란 으깬 스타일..."까지 말했는데 내 손에 들린 것은 '에그포테이토샌드위치'였다. 내 취향을 알아주기까지 정확히 18년 걸렸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조금 더 걷다 보니 바로 3봉이다. 이 산 뭐지? 할 만하잖아!



작년에 올랐던 산 중에 강원도 홍천 팔봉산이 있었다. 일봉부터 시작한 8개의 정상석들은 다소 부실하거나 숨어 있었다. 오봉산이니 5개만 거치면 되는데 벌써 3봉이라니.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호가 삼봉이었지, 응사에서 내가 좋아하던 그가 칠봉이었지, 아무 말들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와 봄산으로 스며들었다.


최소 다섯 번은 정주행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나는 칠봉이를 좋아했다. (극 중 유연석) 수더분한 외모도 다정한 말과 행동도 넓고 넓은 어깨도 내 스타일이었다. 수천 km 날아가 만난 이 오빠의 첫인상은 나의 이상형에 가까웠다. 다만 말투는 영락없는 '쓰레기'(극 중 정우)였다. 결코 만난 적 없던 경상도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호감이었을까.




"여기에서 나 사진 찍어 줘."


오가는 등산객들이 하나도 없었다. 멀리 소양강이 내려다 보이고 연로한 소나무가 가득한 어느 바위 위였다. 내가 원하는 폰의 각도와 사진사의 자세까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몸은 날씬해 보이게 다리는 길어 보이게 찍어 주어야 한다는 나의 요구 사항은 이번 등산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언제쯤 이 사람에게서 나의 인생샷을 건질 수 있을까. 오늘도 아니네 하면서 4봉에 도착했다.



"사장님, 5봉까지 얼마나 더 가면 됩니까?"

"여기만 오르고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아뿔싸. 약 75도로 추정되는 급경사 로프줄이 나타났다. 내려오는 등산객 한 분에게 물어보았다. 식당도 아닌데 왜 사장님이라고 불러? 그래야 좋아하니까. 저 사람의 '조금'과 나의 '조금'이 어느 정도 일치하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작년 가을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며 남편과의 불화(!)가 시작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조금'은 한 200걸음, 그의 '조금'은 2km였다. 다시 만날 리 없는 등산객 분의 '조금'도 나의 그것과는 현격히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다 보면 도착하게 된다. 오봉산의 5봉에 도착했다.



BAC 블랙야크 100대 명산 GPS 인증을 했다. 정상석 사진을 찍었다. 작년 결혼기념일 선물로 함께 산 하얀색 커플 등산점퍼를 입고 셀카를 찍었다. 세수도 안 했는데 곱게 입술까지 바른 사진을 찍어주는 앱은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 노벨상은 못 주더라도 궁디팡팡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한 바퀴 돌며 풍경 사진을 찍었다. 그 풍경 끝에 나와 함께 해 왔고 해 나갈 그가 서 있다.




"아이고, 이뻐라. 꽃띠네 꽃띠!"


이여사 연배일까 어머님 연배일까. 어르신 두 분께 천천히 가시라 양보하며 서 있는 순간, 한 분이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앗, 저는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양띠인데요. 오늘부터 꽃띠 할게요, 꽃띠. 히히. 어르신의 등산 점퍼에도 연분홍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여보, 나 내일 줌미팅 주제가 '내일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인데, 당신이라면 뭐라고 할 거야?"

"뭐 별 거 있나. 그냥 오늘처럼 하던 대로 편안하게 보내면 되지."

"아니, 유언장을 쓴다면 누구한테 뭐라고 쓸 거냐고."

"당신한테 써야지. '내가 못다 한 BAC 100 전국의 산들을 다녀 주시오'라고 써야지."


그동안 함께 다닌 산이 30개 정도 쌓였다. 안 좋은 산은 없었지만 딱히 좋은 산도 크게 없었다. (아, 설악산과 한라산은 여러 의미로 기억에 남긴 했다.) 오늘 이 산은 조금 가면 정상석이 나타났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붐비지도 않았다.



"나는 오늘 오봉산 좋네. 다음 산 추천도 허하노라."

"나는 배가 허하도다. 맛집 찾아보자."





강원도에 왔으니 막국수지. 앗, 테이블마다 올려져 있는 감자부침도 먹어 주어야지. 메밀전병도 녹두부침도 맛있겠다. 막국수에는 실은 편육인데. 막걸리를 시키지 않은 건 왕복 운전하는 사람을 위한 나의 마지막 의리로다.


"막국수는 왜 막국수일까?

막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맛있어."

"막 먹으니까 막국수겠지."

"(뭐래.) 우리 식구는 다 면발 킬러인데. 당신은 어떤 국수가 가장 맛있어?"

"내가 만들었던 페투치니지. 당신도 맛있다고 잘 먹었잖아."

"(입을 삐죽 대며) 맛있어서 먹었나. 그땐 콩깍지가 씌웠으니 맛있다고 착각하며 먹었겠지."

"(시선은 그대로 앞에 두고) 콩깍지는 벗겨졌으니 손깍지나 끼자."


이 사람의 아재 개그나 말장난은 너무 싫지만 꽈악 잡은 손깍지는 싫지 않았다. 공룡 능선에 가자는 제안에 오늘도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아주 아주 만약에 다녀온다면 글 두 꼭지는 나올 것 같다. 두어 번의 불화도 분명 있을 거다. 두어 번의 추억도 분명 쌓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