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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원피스 한 벌이 있다.
고동색 바탕에 얇은 검은색 체크무늬가 있고 푸른빛 꽃들과 초록빛 잎들이 그려져 있는 원피스. 찰랑찰랑 녹색 여름 원피스는 초록색 카디건과 베이지색 얇은 코트와 함께 가을의 여러 장면에서도 나와 함께였다.
#장면 1
나는 기억한다.
좋을 것이 분명하지만, 일면식뿐인 이들과 1박을 할 수 있을지, 그들만의 잔치에 불청객이 되는 건 아닐지, 나를 위해 이렇게 큰 비용을 써도 괜찮을지, 한참 고민했음을. 고민 끝에 혼자 오른 기차 밖 풍경은 연두가 조금씩 지쳐 초록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함께 나눌 책과 시집을 펼쳤지만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그저 신이 났음을. 그저 설렜음을.
나는 기억한다.
전주역으로 마중 나온 이가 건넨 약과 한 개를. 이름도 맛도 다정하던 수제 돈까스와 필라프를. 취향 저격 웰컴티 한 잔과 국산 콩으로 만든 보글보글 순두부를. 향긋한 아침 커피와 달콤한 저녁 와인을. 매일 먹어도 좋을 법한 부드럽고 고소한 누룽지와 정갈한 8첩 반상을. 사과차와 한과와 무화과를. 직접 딴 알밤과 직접 말린 천일홍꽃을. 불맛 나는 주꾸미볶음과 ASMR 최강자 파전과 막걸리 한 잔을. 극진한 대접이고 환대이고 호사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연두를 지나 온몸으로 초록을 뿜어내던 9월 첫날의 온도와 습도를. 여름도 가을도 아니었지만 여름이었고 가을이었음을. 책 시집 그림책이라는 시작한 점 하나하나가, 공감 감동 동행 행복이라는 가늘고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져 마침내 만나던 순간순간을. 모든 것이 벌써 그리움이었음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 시작되었음을.
#장면 2
나는 기억한다.
좋아하는 책을 답할 때는 쉽지 않지만, 좋아하는 작가를 답할 때는 앞쪽에 언급하는 외국 작가의 신간 제목을. 그의 책들을 모은 장소를 발견했을 때 꼭 가야겠다고 일정을 조정하던 바지런함을. 나만큼이나 바지런한 팬들 사이에서 줄 서 있으며 어쩌면 그도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그제야 떠올리고 두리번거렸던 기대를. 그리고 혹시나 마주칠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편 혼자만의 단장을.
나는 기억한다.
스크래치 행운권도 기차역 콘셉트의 아담한 장소도 진열된 작가의 책들도, 모두 그와 연결되어 생각하기 시작한 기시감을. 손 한번 입술 한번 맞닿지 못했던 순도 100%의 100일 동안 그와 나는 와타나베와 미도리는 아니었을까 이젠 헛되고 만 상상을. 그의 싸이월드 대문명이었던 제목의 책을 들었다 놓았다 펼쳤다 덮었다 혼자 쓰게 웃었던 쓸데없는 추억의 페이지를.
나는 기억한다.
통행증 발급 기계가 고장 나 잠시 기다리는 동안 찾은 주변 식당에서 순살로 끓인 닭볶음탕을 호호 불어 맛있게 한 입 먹던 만족감을. 통행증을 받으러 다시 들렀을 때 책갈피를 하나 더 받고 싶다 부탁했을 때 건네주던 곱슬머리 흰 얼굴 스태프의 사람 좋은 미소를. 셀카 한 장을 안 찍었구나 아쉬웠던 차에 문학동네 sns에 올라온 사진에서 내 뒷모습을 발견한 안도감을.
#장면 3
나는 기억한다.
이름은 ‘매우 한가로운 사인회’였지만 결코 한가롭지 않을 것임을 짐작해 가장 이른 시간에 신청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비 오는 연희동 골목에 토요일 오후 누가 찾아오겠냐고 하는 그 ‘누가’들이 300여 명이나 되었던 것을. 그에게 향하는 지하철에서 자리도 없이 서서 읽으며 줄줄 읽히는 글줄과 술술 넘어가던 페이지들을. 무려 초판 1쇄를 내게 넘겨주었던 다독가이자 정독가인 지인에 대해 새삼 고마운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지하철 두 번 버스 두 번을 갈아타고 도착한 정원이 멋진 집 같은 출판사에 내가 두 번째로 도착했음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고 포토존 사진도 찍어 준 곱슬머리 흰 얼굴의 스태프분이 하루키 스테이션에서의 그분이었던 것을. 초록 원피스를 입고 사진을 찍으면서, ‘아, 나는 마이 그린 드레스 2를 쓰겠구나.’라고 떠올렸던 찰나를.
나는 기억한다.
작년 국제 도서전에서 뵈었을 때보다 조금 더 많아진 흰머리와 조금 더 두꺼워진 옷차림과 조금 더 주름진 미소의 여유로움을. 정원도 창문도 책상도 빗소리도 출간 20주년 축하하는 핑크 반짝이도 찰떡같이 어울리던 장소를. ‘지그시’ ‘그윽하게’라는 부사를 구현해 내는 그의 환대를 두 번이나 받는 것은 복(福)이라는 두 번이나 반복한 장소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빗소리를 맞으며 주름진 미소가 익숙한 ‘나의 그’를 만나러 가는 길, 검은 꽃이 아닌 가을꽃 같은 우리의 순간이 피어나고 있었음을.
#장면 4
나는 기억한다.
길 위의 인문학 2023 모집 공지를 보자마자 바로 연결도 되지 않는 신청 링크 긴 주소를 하나하나 자판을 눌러 연결해 신청한 또 다른 바지런함을. 이번에도 책 선물을 받겠구나 작가 강연을 듣겠구나 내 글을 담은 문집을 만나겠구나 예상되는 설렘을. 그리고 그 예상 가능한 설렘이 두근두근 기다림으로 바뀌어 가던 한 달여의 시간을.
나는 기억한다.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는 동안 내내 서가며 얇은 시집 한 권을 챙긴 다행을. 처음 내린 지하철역 처음 만난 사람들 처음 방문한 책방과 카페 처음 가 본 진관사 수많은 처음들을. 두 번째로 세 번째로 여러 번째로 함께 한 이들과 따로 또 같이 내딛던 발걸음을. 새 은행잎을 새 팀원을 새 책을 새 연필을 새 문집을 만나며 두 번으로 세 번으로 꼭 다시 만나고 싶었던 기약 있는 기대를.
나는 기억한다.
작년에 이어 낭독하겠냐는 질문에 꼭 다시 읽고 싶었던 이유 있는 욕망을. ‘마이 그린 드레스’를 낭독하려 그 초록 원피스를 입고 왔고 ‘마이 그린 드레스 2’를 쓰겠다고 발표하며 다독인 다짐을. 그 다짐에 미소로 응원해 준 여러 반짝이는 눈들을. 글에 나온 작가가 그 작가 맞냐는 질문에 오답에는 눈 맞추며 웃었고 정답에는 눈을 피해 미소 지었던 내 맘 속 딩동댕을.
나는 기억한다.
올해는 꼭 나와 함께 하려 두 날짜 모두 신청한 정성과 혼자 가는 화장실을 말없이 따라와 주던 세심함을. 작년 처음은 어색했지만 올해는 처음부터 내적 친밀감을 사정없이 뿜어준 환한 환영의 포옹을. 좋은 시간 소개해 주어 고맙다며 이름난 작가들이 썼던 디자인이라며 꼭 선물하고 싶었다며 덥석 손에 안겨주던 와인 색상 연필의 매끈함을. 어색하고 피곤하고 귀찮았을 텐데 모두를 챙기고 기다리고 사진 찍어 주고 글씨를 더 길게 써주던 뚝뚝한 배려를. 은행나무길의 절정은 이번뿐이라 했지만 함께 못한 나의 아쉬움을 노란빛 사진과 연분홍빛 미소로 달래주었던 다정함을. 진행하느라 내내 웃음기 없던 긴장한 얼굴이, 마친 후 함께 기울이는 막걸리잔과 단짝의 안 웃긴 한마디에 까르르 더없이 활짝 피어나던 웃음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