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점심
"엄마, 밥 주세요."
어이쿠,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도시락을 챙겨 담은 쇼핑백을 뒷좌석으로 건넨다. 롱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메고 손에 하나씩 든 비슷한 몇 명들 사이로 이내 사라지는 아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엄지와 검지를 벌려 당긴 다음 그 뒷모습을 찍는다. 귀하고 귀한 사진 한 장 또 한 장.
아이는 어릴 적부터 입이 짧았다. 3.26kg 남부럽지 않은 체중으로 태어났지만 젖도 이유식도 밥도 배불리 먹는 법이 없었다. '엄마 젖이 부족한가 보다, 엄마 이유식이 맛없나 보다, 엄마가 밥을 못 하나 보다.' 아는 이 모르는 이가 던지는 한 마디들이 가시가 되어 박혔다.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크면 잘 먹겠지. 내년이면 성인이 될 아이는 여전히 식사량이 적다. 제 어미와는 다른 체형과 체중을 유지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이 스쿨은 방학을 했고 윈터 스쿨이 시작되었다. 학원에서 진행하는 겨울방학 프로그램.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과표에 맞춰 각자 공부를 하고 스터디 플래너를 작성해 순공부 시간을 기록한다. 10-to-10 관리형 독서실 모드다.
점심 도시락을 싸달라는 아이의 요청에 유치원 소풍 때나 등장했던 도시락통을 찬장에서 찾았다. 지난 써머 스쿨에는 밥친구와 인증숏으로 엄마의 승부근성을 은근히 자극하더니, 이번 겨울에는 혼밥을 한단다. 우리 대표님(!) 무슨 음식을 먹여드릴까 도시락 반찬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 때는 말이야, 급식이 없었어. 다들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지.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점심 하나, 저녁 하나, 두 개의 도시락을 들고 가는 게 다반사였다고.
집에서 7시 전에 나와서 밤 1시 전에 들어갔었다고 앞서 얘기했었지? 도시락 두 개를 싸달라고 한 적은 없었어. 점심 저녁 똑같은 메뉴를 먹는 게 싫었거든.
급식이 없는 대신 매점과 식당은 있었어. 매점은 쉬는 시간마다 너무 붐비고 지하 1층 구석에 있어서 오가는 동선 자체가 너무 길어서 잘 안 갔어. 간혹 매점 가는 친구가 있으면 부탁을 하곤 했지. 빵 셔틀은 아니니 오해 말고.
역시 지하에 있었던 교내 식당은 저녁때만 운영했어. 메뉴는 비빔밥 육개장, 딱 두 종류. 별 맛없는 나물 몇 가지와 다 식은 계란프라이가 올려진 비빔밥과, 고무줄 같이 질긴 고사리와 잘 안 먹는 종류 그거 뭐지? 토란대? 암튼 그거 안 먹고 건지고 대파 안 먹고 건지고 하면서 국물과 계란 푼 거 있는 육개장, 이렇게 두 종류였어. 가격은 둘 다 1,700원. 딱 그 가격만큼의 맛이었어. 그거 아니면 컵라면, 또는 빵이랑 우유로 대충 때웠고.
아, 후문 밖에 식당도 하나 있었다. 칼국수를 비롯한 분식 종류가 있었는데, 역시 엄청 붐벼서 저녁 시간 종 치기 전에 담을 넘어 나와야 먹을 수 있었어.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면 저녁 시간 끝날 즈음에야 들어올 수 있어서 거의 안 갔던 것 같아.
매점도 교내 식당 및 후문 식당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면서 어쩜 먹는 족족 살이 붙었을까. 1학년때 헐렁하게 맞춘 교복 치마허리가 3학년 때는 딱 맞춘 듯이 잘 맞았다는 건, 쉿, 안 비밀이야.
"나야, 조림핑."
최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2를 관심 있게 보았다. 경연 프로그램이 주는 긴장감 속에 담긴 참가자 각각의 스토리와 열정에 매 회 감탄했다. 종영 후에도 여운이 남은 건 최강록 셰프. 우승자라는 이유 말고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마치 박정민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빠르지 않은 말투 속에 허튼 말이 하나 없고, 화려하지 않은 기교 속에 정성과 진득함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뭉근히 끓여 익혀내는 조림이라는 조리법 또한 그와 많이 닮아 있었다.
'주관식당'이라는 (최신은 아닌) 콘텐츠에 새로 빠졌다. 손님의 주문서에서 스토리와 취향을 발견해, 마음과 정성을 다한 음식으로 오감을 만족시키는 1인 식당 프로그램. 오직 나를 위한 음식과 세팅, 문구와 진심들에 마치 그 앞에 앉는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다. 한 회 한 회 아껴서, 특히 주방에 서 있을 때 시청하곤 한다.
"나야, 도시락."
이왕 하는 일, 지금 이 순간 '요리사'가 되었다고 상상해 본다. 양파 껍질을 까지 감자를 채 썬다. 재료 준비에서부터 나의 요리가 시작된다고. 별거 아닌 메뉴에 하나라도 바꿔 볼까 시도하고, 이왕이면 예쁘게 담아볼까 소꿉놀이하듯 도시락을 준비한다. 셰프가 아니면 어떠랴.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 줄 이들의 입맛과 취향을 그려내는 화가든, 연주해 해는 음악가든 내 멋대로 갖다 붙이면 되지.
"올해 기도 많이 하셔야겠네."
아이가 올해 고3이라는 말을 하면 돌아오는 안쓰러움 담긴 어정쩡한 미소는 언제쯤 익숙해 질까. 친정에선 하나님께, 시댁에선 부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고 계실 테니. 도시락을 챙기는 일은 어쩌면 나만의 기도. 도마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착착착 칼로 재료를 잘게 다지며 내 마음도 다져 본다. 좋은 기운과 응원의 마음을 통에 담아 두었다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짜잔~'하고 아이를 안아주길 바라면서. 오늘도 남김없이 싹 다 비워오길 바라면서.
덧) 저녁에 아이가 돌아오면 도시락통부터 열어 봅니다. 오늘 저녁 저는 생존일까요, 탈락일까요.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