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씬디북클럽 Oct 12. 2022

안녕, 안녕 나의...

가을글방 #3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연분홍 네모반듯 자그마한 시집 한 권을 집어 든다. 단아하고 정겹게 말을 건네는 시와 그 따스하고 정답게 그린 그림이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든다. 오직 한 사람이 읽힌다.


  ‘떨어져 있어도 가까운 마음으로 그리움 담아 전하는 글’ 표지의 글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덜커덕 내려앉는다. 가까이 있어도 멀어진 마음, 그리움은커녕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사이. 과거형 문장 속 우리.     

   

친구에게, 이해인 글 이규태 그림, 샘터, 2020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 손을 흔들고 나면 엄마들은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우리 둘만 남은 어느 아침. 비 오는 날에는 카푸치노라며 주문한 두 잔. 시나몬 거품이 묻은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문득 찾아오던 어색한 침묵이 힘겨웠을까. 두 집의 아이들을 재운 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런 시간 절실했다며 한 잔,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며 또 한 잔, 얼음처럼 시린 잔들을 비우고 채웠다. 장난으로 말했다. 우리는 아마 ‘술 메이트인가 보다’라고. 그해 여름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전어는 꼭 가을에 먹어야 제맛이라고들 한다. 꼬들꼬들 씹히는 맛을 천천히 즐기며 초록 병에 담긴 맑은 술을 따랐다. 집 나간 며느리가 굳이 돌아올 정도인지 아닌지, 굽는 것이 맛있는지 회가 더 나은지 가을밤이 깊도록 웃고 또 웃었다.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계절에는 우리만의 암호를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동그라미를 만들면, 막창을 먹으러 가자는 신호였다. 초벌구이 지글지글 소리 가득한 식당 한구석은 우리의 전용석이 되었다. 둘둘 두른 목도리에 동그란 냄새가 배었고 이내 한겨울 빛깔이 되었다. 모든 생명이 움트는 새 계절에는 우리들의 생일이 있었다. 가리비에 담긴 싱싱한 회와 잘 구워진 양갈비를 먹었다. 폭포처럼 흐르는 초콜릿 분수에 마시멜로를 담갔다. 붉었는지 맑았는지 잔을 부딪히며 눈을 맞추었다.      

  

  우정을 노래하고 사랑을 담았다. 너를 보는 나의 눈빛 나를 보는 너의 눈빛. 봄밤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전부이고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계가 한 바퀴 더 돌았다.      

 

 “엄마, 배고파.”     

 

 아이의 성화에 시집을 덮고 냉장고를 연다. 참치캔을 통째로 넣고 볶은 김치와 달걀 지단을 부쳐낸다. 김발 위에 김을 깔고 고슬밥을 얕게 편다. 김에 밥알이 달라붙도록 꼭꼭 누른다. 김밥 속 재료들이 꼭꼭 붙는다. 숨 쉴 틈 없이 꼭꼭 붙는다. 숨이 막힐 정도다. 그 계절들 속에서, 우리는 김밥 속 재료들 같았다.      


  서늘한 바람이 통할 정도의 틈. 그 틈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또 다른 책을 펼친다. 여우가 왕자에게 말한다. 친구가 되려면 길들여 달라고 한다. 무척 참을성이 많아야 한다고도 한다. 말이란 오해가 생기는 근원이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때의 우리에게 여우의 충고는 들리지 않았다. 길들일 시간도 없이 가까워졌다. 네 시에 오기로 했지만 왜 모든 걸 제쳐 놓고 내게 더 빨리 오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솔직하다는 이유로 달콤한 말도 할퀴는 말도 모두 뱉었다. 찔리고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생겨난 딱지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할퀴고 베었다.      


  우리는 여우의 충고에 귀 기울여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다시 시집을 펼친다. 파도를 등진 바다에서, 함께 걷는 숲속에서, 힘을 더하던 산자락에서, 카페의 폭신한 소파에서, 모든 그림 속에서 우리를 본다. ‘_____에게’ 라고 적힌 빈칸에 너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적었다가 손바닥으로 지운다. ‘안녕’이라고 다시 적는다. 안녕을 묻는 걸까 안녕을 바라는 걸까.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선다. 해는 짧아지고 밤바람은 차갑다. 앞섶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딛는다. 요 며칠 내내 흐리더니 밤하늘에 안개가 자욱하다. 10월의 달이 안개 속으로 숨는다. 그림자를 마음을 여미고 입으로 되뇌어 본다. 안녕.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2017


이전 05화 어서 와, 대청봉은 처음이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