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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씬디북클럽 Oct 02. 2022

어서 와, 대청봉은 처음이지?

설악산 대청봉 등반


'노마위유'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노 마운틴 위드 유니 No Mountains with Yoonie의 약자로 내가 만든 단어다. 재작년 가을 온 가족 인왕산 둘레길을 걸은 후 더 이상 산에 가지 않겠다는 유니의 단호한 선언을 표현한 단어다. 그리고 해발 약 1500m 지점에서 '노마위씬' 이란 단어를 만들어 냈다. No Mointain With Cindy.


남편의 취미는 등산이다. 2020년 하반기부터 그와 함께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을 시작, 25개의 산 정상에 올랐었다. 인증의 재미가 시들해져 가까운 광교산 형제봉에 주중 혼등만을 하는 내게, 그는 수시로 설악산(정확히는 공룡능선)에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3년 전의 혼등이 정말 좋았다 했다.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 본 사람은 없다며. 좋소, 그대를 나의 설악산 셰르파로 임명하겠소.



셰르파는 한계령으로 출발해 오색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정했다. 등산로 입구로 향하는 꼬불꼬불 산길은 먹은 것 없는 빈 속의 내장도 꼬불꼬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첫 스틱을 딛자마자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셰르파는 말했다. "괘안타, 이 정도로 안 죽는다." 아, 밀어 버릴까.


'설악산의 단풍이 10월 중반에 절정을 이룰 예정입니다.'는 가을 뉴스 단골 멘트 아니었던가. 산 중턱부터는 이미 절정을 지나쳐 결말을 향해 시들어 가는 듯했다. 아직 남은 단풍나무들만이 빠알갛게 버얼겋게 '마! 이게 설악산 단풍이다.'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최근 접했던 시 한 구절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구수하게 뱉어졌다. "오메 단풍 들겄네."



저 웅장한 암벽을 보아라,

하늘이 장난이 아니다,

운해가 예술이다.


나의 셰르파는 계속해서 감탄을 반복하며 내게도 강요하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절경을 이미 눈에도 폰에도 충분히 담은 내게는, 내 그저 똑같은 돌멩이고 하늘이고 구름이 되었다. 형제봉 왕복 두 번을 할 시간에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 정상. '거의 다 왔다.'는 희망고문 한 마디만 믿고 다시 내딛던 걸음. 아뿔싸, 나는 한 200m로, 그는 약 2km로 달리 해석되던 한 마디가 바로 '거의'였다. 아, 이번엔 정말로 밀어 버릴까.


끝청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위기'였다. 침묵 속에 걷고 또 걸었다. 한껏 찌그러진 인상이 시야를 가리는 모자를 뚫고 나왔다. 가방을 본인에게 달라는 그의 말을 뿌리치고 앞서서 마구 걸었다. 화장실도 거리도 산세도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이곳. 중청대피소에서 발열 소고기 비빔밥 한 팩을 열었지만 입맛도 밥맛도 없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한 끼를 때우는 동안, 저 멀리 보이는 대청봉에는 응급 환자 이송을 위한 헬기가 두 번 오갔다. 여기, 여기도요,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




출발 5시간 50분 만에 도착한 정상 표지석. 인증 사진을 위한 줄은 끝이 없었다. 이 사진 찍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도 없었다. 한 캔 시원하게 따는 어르신, 표지석 뒤로 점프를 하며 사진 찍는 아저씨,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풍보다 화려한 색감의 등산복 입은 아줌마, 남자 친구에게 힘들다고 징징대는 레깅스 미녀, 하산 일정을 공지하며 파이팅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산바람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스쳤다. 셰르파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수고의 말을 건네며 하산길 예고를 요청했다.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했다. 올라왔으니 내려는 가야지. 접수 완료.



정상을 함께 했지만 우리의 언어 전달과 해석은 여전히 비정상이었다. 가지런히 반듯하게 정돈된 돌 '계단'을 상상한 내 눈앞에선 울퉁불퉁 제멋대로 돌 '밭'이 나타났다. 이런 돌길을 '너덜'길이라고 한단다. 너덜길에서 내 온몸도 너덜대기 시작했다. 한눈팔다 여차하면 정말로 헬기 탈라, 땅만 보느라 목이, 디딜 곳을 밟느라 발바닥이, 내리막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하느라 무릎이 너무나 아팠다. 순간 내 옆을 스쳐 바람같이 사라지는 네이비색 크록스 신발. 아, 당신은 설악산의 신령님이신가요, 아니면 바람돌이인가요.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를 한없이 원망하며 산을 올랐다. 하산 길에는 누군가가 틀어놓은 '한계령' 한 소절이 들려왔다. 앗, 저 산이 내게 오지 말란다. 내 여길 다시 오나 봐라 곱씹었다. 마지막 가사를 읊조리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산은 내게 내려내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출발 11시간 50분 만에 하산을 완료했다. 평탄한 흙길을 걷고 싶어요, 등산화 벗고 양말도 벗고 싶어요, 편의점 얼음컵에 캔맥주를 따라 벌컥벌컥 하고 싶어요. 내내 바란 소소한 소원들을 하나하나 성취했다. 돌아오는 차에서 들어 본 '한계령'의 가사는 '오지 마라 오지 마라'가 아니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눈 설 雪 큰산 악 嶽.

열흘은 갈 거라는 팔다리의 고통이 잊힐 즈음, 셰르파의 말대로 언젠가 나는 다시 이곳을 찾고 싶어 지게 될까. 어슴푸레 이른 아침 첫인사를 나눈 산은, 어둑해진 저녁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차창 너머 산에게 눈길을 주었다. 마주 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빌어 주듯이.

 



p.s. 3kg는 줄었으리라. 먹고 마실 자격 내겐 있느니라. 마음껏 먹고 마신 다음 날 올라선 체중계는, 정확히 사흘 전의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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