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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씬디북클럽 Sep 29. 2022

5월의 가을, 어쩌면 겨울

가을 글방 #2-3 글로 그리는 장면

  쾅하고 부서질 듯 소리를 내며 택시의 뒷문이 닫힌다. 대학생 손님 지루할까 봐 몇 마디 건넨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기사는 언짢다. 잠시 일그러졌던 이마의 주름은 이내 다림질한 듯 펴진다. 주황빛 택시는 와이퍼를 3단으로 켠 채 급히 사라진다.      


  이 시간에 왜 병원에 가느냐, 누가 아프냐, 간호원이냐, 기사의 질문들은 손님을 더욱 힘들게 했다. 간신히 참고 있는데, 죽도록 힘을 다해 터질 듯한 눈물을 참고 있는데 의미 없이 묻는 말들은 역겨웠다. 아빠가 위독하니 서둘러 가달라고 짜증을 부린 후에야 기사는 말없이 운전했다. 집어던지듯 택시비를 뿌리고 뛰어 들어간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흰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건물은 비를 맞네 회색빛으로 한껏 뿌옇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뛰어 계단으로 오른다. 3층 가장 구석의 방, 초록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중환자실 네 글자가 쓰여있다. 열렸다 닫혔다 자동문을 통과한다. 인공호흡기의 압축기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의료진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조차 오늘은 없다. 가장 구석진 침대로 발길을 재촉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가 누워있다. 만약 하얀 무언가가 얼굴까지 덮고 있으면 어쩌나 졸아들었던 마음이 아주 잠깐 안도한다. 이 순간에 안도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딸, 니 아빠 편안하게 갔어.” 곁을 지키고 선 그의 아내가 말한다. 가뭄 끝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눈물이 가득 담긴 버얼건 두 눈.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사내의 마지막 숨이 붙어있을 수 있도록 한껏 매달려 임무를 다했던 콧줄이 보이지 않는다. 파도치는 물결모양이든 ‘뚜우-’ 소리를 내는 한 줄이든 삶과 죽음을 보여주던 비인간적인 기계도 안 보인다. 손등에 꽂혀 있던 주사 바늘도 침대 곁의 링거 병도 사라졌다. 코와 입에 걸려있던 줄들이 치워지니 그의 오뚝한 콧대와 붙어버린 입이 보인다. 초점 잃고 몽롱했던 눈도 굳게 닫혔다. 저 코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으면, 저 입이 벌어져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저 눈이 다시 한번 떠져 눈을 맞춰 주었으면. 떨리는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부여잡고 그의 코와 입술과 눈을 만져본다. 아직 차갑게 식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두 번 열었다 닫은 그의 머리에 털모자를 씌웠던 계절을 보냈다. 새 계절에 씌웠었던 하얀 망사 모자 그마저도 벗겨져 있다. 까끌까끌한 밤송이 같은 머리칼 사이로 딱지가 되어 앉은 흔적들이 어지러운 길처럼 헤매고 있다. 그 안을 가득 채워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 그것들도 이제 그와 함께 모든 숨을 멈추었을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입으로 뱉었는지 속으로 삼켰는지 모를 말들이 꼬리를 문다.     

    

  한 노인이 먼발치에 서 있다. 선 같이 얇고 작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쉴 새 없이 손수건으로 찍어낸다. 노인은 사내의 욕창을 돌보고 소변통을 비워내고 보호자 대기실에서 쪽잠을 잤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사내의 곁을 지켰다. 하루하루 시들어 간 아내의 눈은 노인의 그것과 꼭 닮아 얇고 작다.  

    

  짙은 하늘이 더욱 짙어지고 5월의 빗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상실의 감각이 매섭게 모두를 훑고 있는 이곳, 지금은 지극히 깊고 깊은 가을이다. 지독히도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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