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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씬디북클럽 Sep 29. 2022

Old Man

가을 글방 #2-1 글로 그리는 그림


  한 노인이 눈앞에 있다. 미동도 없다. 손으로 대강 주물러 반죽한 빵 모양 모자를 쓴 노인. 모자의 얇은 챙이 만든 그림자에 가려져 눈썹이 확연히 드러나 있지는 않다. 세월이 가득 내려앉은 주름진 눈꺼풀. 두 눈은 얼핏 짝이 맞지 않아 보인다. 나를 보고 있다. 아니, 내 뒤쪽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콧날이 높다. 콧잔등 위로 얹어진 안경알은 반달 모양 같기도 송편 모양 같기도 하다. 가만 보니 노인의 눈은 안경알보다도 크고 둥글다. 몽롱한 눈빛, 동시에 또렷하다.


  수염인지 머리카락인지 성성한 그것들이 모자 아래부터 이어 늘어져 노인의 가슴 앞섶까지 닿아있다. 미술 데생 수업 전 서걱서걱 뭉툭하게 깎은 4B연필로 슥슥 선을 그은 듯한 수염이다. 면도는 안 한 듯 하나 단정히 정돈된 수염. 핼쑥한 뺨과 코언저리를 덮은 수염은 노인이 말을 할 구멍조차 덮어버렸다. 쭉쭉 뻗은 수염이 눈처럼 희다. 쓱쓱 한참 동안 쉼 없이 그은 선들이 노인 웃옷의 여백을 빈칸 없이 검게 채웠다. 주머니도 장식도 없는 옷이다. 서걱서걱 연필을 다시 깎아 그은 듯한 선들이 노인의 뒤를 채웠다. 노인의 옷을 채운 검은색보다는 옅게 조금 더 옅게. 잔잔한 선들이 노인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노인의 등 뒤 어두운 벽도 만들었다.


  흘끗 노인이 나를 응시한다. 노인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을 건네본다.      


  “어르신,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허옇게 말린 옥수수수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입술이 실룩 움직였다. 노인이 천천히 입술을 열어 단조롭고 건조한 음성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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