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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Sep 28. 2016

죽음의 무게

시체를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랑 전 회사에서 카데바 워크숍을 갔었을 때 딱 두 번이다. 


할아버지의 시체는 시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친숙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곡기를 끊고 조금씩 말라갈 때에 그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염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냥 그렇게 숙연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보냈다. 준비한 죽음은 확실히 조금 덜 슬프고 무섭지 않다.


호주에 카데바 워크숍을 갔을 때 본 시체는 생경했다. 그나마 외국물 좀 먹은 나였지만 백인들의 시체 그것도 머리만 덩그러니 놓인 풍경은 짐짓 섬뜩하기까지 했다. 훤한 대낮이었으니 망정이지 어두컴컴한 병실이었다면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구강악안면외과 관련 카데바 워크숍이었기 때문에 사실 사지 부분은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안구는 또 따로 기증을 했는지 눈은 없고 눈 부분이 가려져있었다. 눈 없는 머리만 있는 시체들이 죽 늘어 선 그 광경은 평생 다시 보지 못할 기이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체의 경험을 비릿한 피 냄새와 코를 찌를듯한 시체 썩는 냄새 따위로 기억했다. 내가 본 시체들은 피를 흘리지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은 아니 약품처리를 한 것들이었으므로 나는 그때의 분위기와 나의 느낌만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했던 순간들. 그것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든 생명부지의 사람의 죽음이든 나는 그 앞에서 저절로 숙연해졌다. 죽음이 어떤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직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생의 끝자락에 있는 것들은 슬프고 측은하기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죽음의 무게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들에게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나는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체들 앞에서 죽음은 누군가에게 살면서 짊어진 무게를 덜고 가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게가 어떤 남겨진 자들에게는 짐스러운 것일지도 또 어떤 남겨진 이들에게는 그들의 남은 생을 지탱하는 버팀돌일 게다. 


얼마 전, 농민 백남기 씨가 돌아가셨다. 나는 그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고 그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도 상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단지 그의 죽음이 온 국민들에게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의 무게를 주고 떠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죽인 자도 죽은 자도 말이 없다. 미안한 마음의 무게에 침묵의 무게까지 더해진다.


매일 누군가가 어디선가 죽는다. 멀게만 느껴지는 죽음이 어느 순간 나에게 들이닥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생각한다. 나의 죽음은 나의 사람들에게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문득 생각날 때마다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딱 그만큼의 무게였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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