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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May 01. 2017

혼자 손톱을 깎으며

하루 종일 열심히 걸었다. 발톱이 많이 길었는지 긴 발톱과 신발이 맞닿아 발가락이 아프다. 집에 오자마자 손톱깎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신문지를 펼친다. 발톱부터 깎으려 보니 손톱도 제법 길어있다. 맞다. 요 며칠 이 긴 손톱 때문에 이리 긁히고 저리 긁히고 거추장스러워 혼났다. 그래서 우선 손톱을 가지런히 깎는다. 그다음 발톱으로 시선을 돌린다. 큰 놈부터 해결하자. 엄지발톱부터 골라내어 부여잡는다. 한 발가락씩 야무지게 발톱을 깎아 나간다. 발톱 사이에 때도 말끔히 제거한다. 발톱을 깎느라 한껏 움츠린 어깨를 펴고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손톱과 발톱의 잔해를 살핀다. 신문지 밖으로 도망간 놈은 없는지. 지나가는 쥐가 먹고 내 행세를 할지도 모르니 저 멀리까지 살핀다. 쓰레기통에 한 때 나의 일부였던 놈들을 털어 버린다. "안녕" 건조한 인사를 건넨다. 손과 발을 씻는다. 비누 냄새가 퐁퐁 난다. 나는 어느새 혼자서도 손톱, 발톱을 곧잘 깎는 어른이 되어있다.


한 때 나의 애인이었던 남자는 내 손톱, 발톱 길이를 살피어 길어졌다 싶으면 깎아주곤 했다. 엄마가 아닌 사람이 내 손톱, 발톱을 깎아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내가 깎아 달라고 하지 않아도 그는 가만히 내 앞에 앉아 내 손을 가만히 잡았고 내 발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곧 잘려나갈 손톱, 발톱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에게 제 몸을 온전히 맡겼다. 나는 "가만히 있어"라는 그의 주문에 온순한 양처럼 따랐다. 나의 손톱, 발톱을 깎느라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샴푸 향이 난다.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에 코를 갖다 대고 부빈다. 그리고 "행복하다"라고 말했었다. 


그래. 나의 손톱, 발톱의 길이까지 살피던 그런 사람이 있었지. 발톱의 때까지 내어 보이던 그런 사람이 있었지. 그는 지금 누구의 손을 붙잡고 있을까? 누구의 발을 유심히 보고 있을까? 수만 가지 이유로 너를 사랑했는데 내게 남은 너의 기억은 고작 이런 몇 가지 순간뿐이다. 헤어진 애인의 기억이 서걱거리는 이 밤, 야속한 그의 샴푸 향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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