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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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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Jun 20. 2017

공감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와 같이 숨 쉬고 땅을 딛고 고만고만한 꿈을 꾸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작은 가시에 찔려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다는 것을 잘 안다.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고 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 놓이는 일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경험일지 겪지 않고서도 알고 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아픔 혹은 부재가 그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큰 절망과 상실을 안겨줄 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공감'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화면 너머로 누군가가 슬피 우면 나도 이내 슬픈 감정이 든다.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뿐일 테지만 그 상황에 놓인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나와 동시대에 살지도 않은 문학 작품 속에 주인공의 절절한 사연에 내 마음이 동하는 것도 나는 그에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내가 그 아픔과 고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예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내하며 저지르는 것이다. 이에는 '공감'의 테두리를 넘어선 증오심과 파괴력이 동반한다. 죽을 듯이 미워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직접 찌르고 쏘아 죽일 수 있는 잔인성과 실행력이 점차 번져가는 사회를 목도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함께 눈물을 흘리기보다 셀카를 찍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온다.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로 고층 빌딩에 매달려 일하던 인부의 생명줄을 끊는 일이 일어난다. 아무 죄 없는 꼬마 아이를 환청이 들려서 현실인지 모르고 사지를 잘라 죽였다고 한다.


우리의 공감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러한 괴물을 키워내는 사회구조의 문제인가. 그러한 괴물들의 마음조차 공감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의 공감력은 쇠퇴하고 있는 것이 맞다. 나의 마음에는 그러한 괴물까지 들여놓아 깊이 어루어 만질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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