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엘에이 한인타운에서 어느 새댁이 남편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선 보통 피해자 및 가해자의 얼굴 및 신원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공개된 그들은 그저 애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딱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추가 보도를 통해 두 사람 모두 유흥업계 종사자였으며 가해자인 부인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국적 소지자임이 밝혀졌다. 남편은 이 곳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부인이 오죽했으면 남편을 칼로 찔려 죽였겠냐며 가정 폭력을 의심하는 여론이 많았다. 하지만 추가 보도 후, 영주권을 얻기 위해 시민권자를 꼬드겨 결혼을 했다느니, 화류계 여자가 순진한 2세 남편의 인생을 망쳤다느니 하는 온갖 비난과 욕설이 여자에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속사정도 모르면서 참 입찬소리를 쉽게 내뱉는다.
여자가 정말 영주권 취득을 목표로 남자와 결혼했다면, 그녀가 남편을 그렇게 죽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완전 범죄여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찌르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로 체포되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정도로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이 중요했다면 자신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남편을 그리 죽이기는 어렵다.
피가 낭자한 사건 현장 벽에는 두 사람의 서약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상호 존중하기, 게임 술 어떤 것도 정도껏 하기, 내 편 들어주기, 같이 화내지 말기, 먼저 져주기, 싸움이 나도 가족에게 연락하지 말기 등이 담겨 있었다. 여느 신혼부부가 했을 법한 약속들이다. 싸움이 잦을 수 있는 신혼이니 싸워도 집안싸움으로까지는 번지지 않도록 나름의 상한선도 만들었던 그들이었다. 펜으로 꾹꾹 눌러쓴 서약서는 이제 주인을 잃고 혼자 덩그러니 텅 빈 방을 지키고 있었다.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벌 떼처럼 모여든 기자들의 카메라에 비친 그들의 핏빛 신혼방의 잔상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붙는다.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도록 미워하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이 부부도 한순간 서로가 죽도록 미워졌을까.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고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그 젊은 부인은 유죄가 판명되면 무거운 죗값을 치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작은 다툼을 우려해 정해 놓은 약속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남편은 운명을 달리하고 부인은 차가운 감옥에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과 증오는 한 끗 차이라더니 이 부부에겐 사랑이 너무 잠시만 허락되었나 보다. 서로 사랑으로 써 내려간 예쁜 약속들의 자리 끝에 증오만이 남았다.
출처: 미주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