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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Mar 10. 2016

잉여력

회사를 그만두고 모자라던 시간들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 '한 시간만 더 잤으면'했던 그 간절했던 한 시간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갑자기.


우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읽을 엄두조차 못 내던 <에덴의 동쪽> 같은 장서들도 척척 읽어냈다. 회사 다닐 때에 주문해 놓고 읽지 못하던 책들이 하나둘씩 줄어갔고 급기야 도서관도 찾았다.


바쁘다고 내팽개친 가족들도 돌보고 여행도 갔다. 일을 하지 않으니 돈은 충분치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부릴 수 있는 사치는 생각보다 많았다. 월 1회 무료 개장하는 날을 골라 미술관도 가고 박물관도 갔다. 나에겐 주말 같은 평일이 주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멍도 많이 때렸다. 사실 멍 때리는 일은 잉여의 특권 중 특권이다. 나는 멍을 잘 때리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 삶은 빈틈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는 정말 바쁘게도 살았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적이 손에 꼽는다. 그런 내가 멍을 때리다니... 멍 때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의미 없어 보이던 것에도 새삼 의미를 부여해보고 너무 큰 의미를 두던 것에서 의미를 조금 덜어 내어 보기도 했다.


내가 바다 건너 미국에 왔으니 피곤한 인간관계도 자연스레 청산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만둔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 사람들 이름을 많이 잊어버렸다. 더욱이 영어 이름과 한국 이름을 혼용해서 쓰던 회사를 다닌 나는 누군가의 영어 이름만 기억난다거나 성만 기억난다거나 그런 식이다. 이제 누가 먼저 인사를 했네 안 했네, 쟤가 누구랑 어울릴 근본이네 아니네,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네 안 하네 따위의 듣기 싫은 말과 신경전은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날라 오던 게임 초대 카톡도 점점 줄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나는 비로소 천천히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보다 잔병치레가 잦았으며 멀티플레이어의 소질은 없고 손으로 하는 일들을 좋아했다. 보고 마시고 먹을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며 감투 쓰기는 좋아하나 골치 아픈 정치사에 휘말리거나 굽신거릴 속은 또 없었다. 사람은 좋아하지만 내 사람만 좋아하며 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버렸다.(진짜 버림) 결국 남을 사람은 뭔 짓을 해도 남는다. 그래서 떠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다.(그런 척하는 걸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지 않으며 무소식=희소식이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므로 out of 안중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잉여 짓은 곧 학교를 다니게 되어 6개월을 넘기지 못했지만 그동안 나는 소중한 배움을 얻었다. 나는 잉여력이라는 것이 생겼다. 잉여력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새로운 출발(학업, 재취업)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다시 잉여가 되는 것도 별로 두렵지 않다. 세상에는 쓸모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요즘 회사들은 그 쓸모 있는 사람들을 그놈의 비용이라고만 생각한다. 지난번에는 자의로 잉여가 되었으나 혹여 타의로 잉여가 된다면 내가 쓸모없어졌음을 슬퍼하기보다 잠시 다른 수많은 쓸모 있는 사람들에 기회가 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만 맨날 운이 좋으란 법은 없으니까. 나는 또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쓸모를 찾는 시간을 가지면 그만이다. 그렇다. 잉여가 돼 본 자는 이렇게 자애롭다. 하하.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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