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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Jul 08. 2016

B와 E

B의 모든 비밀번호에는 아직도 E의 이니셜이 들어가 있다. E와 만날 때 가지고 있던 계정의 비밀번호를 굳이 바꾸지 않았고 그 이후에 생성한 비밀번호도 그냥 습관처럼 그의 이니셜을 넣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슬렸을 것이다. 이별 후 순식간에 가장 B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던 그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고 그녀의 지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은 꺼낼 수 없는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슬픈 노래자락에도 눈물이 핑 돌던 그때에 매일 확인해야 하는 메일과 번질나게 드나들던 SNS에 그의 이름을 치지 않고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곤욕이었다. 하지만 습관이란 무섭다. B는 좀체 E의 이름을 대체할 다른 비밀번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때의 B는 이미 오래전부터 입력된 회로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습관적인 일들을 늘 하던 데로 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모래성 같았다. B가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이를 실행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B는 피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E는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지우려면 억지로 지울 수 있겠지만 얼룩은 남을 것이다. 처음의 그 하얀 도화지 상태로는 죽었다 깨나도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E의 이름을 열 손가락 끝으로 매일 타자 치며 무뎌지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E는 결혼을 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자취를 감췄다. 원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앞으로 그의 소식을 들을 일은 전무하다. 아직도 E의 이름은 B 주위에서 종종 떠다닌다. 망할 놈의 싸이월드는 미처 다 지우지 못한 그때에 우리라고 묶였던 둘의 사진을 추억해보라며 불쑥불쑥 들이댄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 E가 썰물로 빠져나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B는 이제 또 다른 밀물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E가 썰물과 같이 순식간에 B에게서 온갖 것들을 앗아 빠져나갈 때에 B가 끝끝내 지켰던 자신에 대한 애정과 곳곳에 앙상하게 남은 추억들은 아직 견고히 남아 B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B는 자위한다. 나도 너란 사람에게서 잊힐 때에 만만치 않은 연애의 유산과 나의 잔해들을 곳곳에 남겼을 것이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였던 시간들이 너무 억울하다. 새로운 사랑이 파도치며 들어올 때에 아마 이것들은 자연스레 덮일 것이다. 굳이 들추지 않으면 그렇게 평생 화석처럼 쌓이고 쌓일 것이다.


E는 B에게 이제 어렴풋한 기억의 한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B는 아무도 들리지 않게 말했다.


"너의 이름이 그렇게 내게 화석으로 남았는데 나는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화석을 남길까? 또 얼마나 많은 파도가 내게 칠까? 나는 또 누군가에게 어떤 물보라를 일으키며 들이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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