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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Jul 25. 2016

술 마실래요?

금요일엔 밑도 끝도 없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출처 없는 이 우울감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워 혼자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다.


토요일에는 동생들이랑 이 주말에 끝을 볼 것처럼 마시고 뻗었다.


오늘도 마음 같아서는 한 잔 하고 싶은데 글을 쓰며 참는다. 글에도 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애주가가 맞기는 맞나 보다. 잘 마시지 못하는 게 흠이면 흠이랄까.


처음 술을 시작했을 때에 맛대가리 없는 이 술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환장을 하나 싶었다. 그래도 사람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는 나에게 술자리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술이 좋다기보다 그 분위기와 정취가 좋은 것이었다.


호된 이별을 겪고 머리만 맞대면 잠이 들던 나는 좀 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친한 언니는 자기 전에 와인을 좀 마시면 그래도 잠이 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퇴근길에 와인 한 병 씩을 사다 마시고 잤다. 그렇게 하니까 그나마 잠이 왔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진짜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 나의 술자리는 술이 주가 아니었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 술이 마시고 싶어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을 많이 마시던 회사에 다닌 덕에 자비로운 법인카드로 정말 많은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래서 나는 술에 있어서도 제 취향을 가지게 될 수 있었다. 소주는 생으로 마시지 않고 꼭 소맥으로 마시고 맥주 중에선 헤페바이젠을 좋아한다. 와인은 쉬라즈 종류, 사케는 온나나카세만 한 것이 없고 테킬라는 지난 내 생일파티에서 먹고 죽은 적이 있어 그 트라우마로 좋아하지 않는다. 위스키는 거의 마시지 못하지만 마시면 스트레이트로는 잘 못 먹겠고 마신다면 온 더 락으로.


술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마시는 법도 알게 되었다. 왼손잡이지만 왼손으로 술을 따르면 주도에 어긋나니 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병을 잡는다. 집 갈 시간은 까먹어도 앞사람 술잔 채우는 센스는 챙기려고 노력한다.


첫 데이트에서 내숭 떨며 레스토랑에서 포크질 하기보다 차라리 선술집에서 한 잔 하는 게 좋고 호감 있는 남자가 술을 못 마신다고 하면 매력 없이 느껴진다. 뭔가 그 사람과는 속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술꾼처럼 이야기하지만 엄청 잘 마시지도 못하거니와 믿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정신을 놓지 않는다.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술 마실 때 개가 되는 사람은 다음에 다시 만나지 않는다.


술을 같이 마신 사람들과는 '술정'이라는 것이 쌓인다. 우리가 술잔을 기울이며 쌓은 시간들은 우리 사이에 이끼처럼 껴 평생을 따라다닌다. 내가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도 바로 이 '술정'을 쌓은 친구들이다. 우리 그때에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었는데 그 이야기들은 온데간데없고 나만 이 먼 이국땅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처음 술을 시작한 것은 누군가를 억지로 잊기 위해서였는데 요즘 나는 억지로 내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마시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난다. 술로 지우는 것이 수월 한 것인지 술로 상기시키는 것이 수월한 지는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술을 끊기엔 글렀다. 그러니까 나랑

술 마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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