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교환학생 시절 나의 호스트 맘이었던 독일어 선생님은 아침마다 신선한 야채를 가득 넣은 오믈렛과 라테를 만들어 주셨다. 매일 먹어도 맛있던 그 오믈렛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 후 갔던 수많은 팬시 한 브런치 집에서 먹은 그 어떤 오믈렛도 선생님이 만들어 준 그 오믈렛에 견줄 수 없다.
학창 시절 신림동 순대촌을 항상 같이 가던 멤버가 있었다. 위생상태도 썩 좋지 않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이지만 우리 셋을 항상 묶어 주던 그 집 백순대는 종종 미치게 먹고 싶다. 우리가 가던 그 3층에 있는 우리 단골집은 아직 있을까?
할머니의 음식 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식혜였다. 명절에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는 꼭 식혜를 해놓고 우릴 기다렸다. 큰 락앤락 통에 밥알이 동동 떠다니는 살얼음이 살짝 낀 식혜는 정말 별미였다. 이제는 할머니 식혜를 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식혜를 마실 때는 꼭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내 동생은 다른 건 다 못 만드는데 닭볶음탕은 기가 막히게 만든다. 살림에는 관심도 없고 1개도 관여하지 않으려는 그녀가 그래도 손수 요리라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니 그 얼마나 고마운가. 그녀가 앞으로 다른 요리도 배워해 줄지는 미지수지만 닭볶음탕만큼 잘 만들지는 못할 것 같다.
서로 회사가 가까웠던 한 남사친과는 퇴근하고 양꼬치를 자주 먹었다. 만나면 서로 갈구기 일쑤였지만 그 친구와의 '양꼬치 엔칭 타오'타임이 그립다. 요즘 같이 지질히 궁상이 따로 없을 때 네가 좀 갈궈줘야 정신 차리는데.
회사 내 절친이었던 모 차장님은 내가 애인과 헤어지고 질질 짜고 다닐 때 '여자를 울리는 술'이라는 온나나카세를 사주셨다. 십만 원도 넘는 술이었는데 나는 헤어진 게 분해서 운 건지 비싼 술을 사줘 고마워서 운 건지 진짜 그 술을 마시고 울었다.
모 부장님은 소맥을 기가 막히게 말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율로 말이다. 딱 원샷하기 좋게.
매일 죽지 않으려고 먹는 먹을 것이 뭐 이리 뇌리에 깊게 박혀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모르겠다. 나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사주고 손수 밥을 해줬는데 나는 뭐로 기억되고 있을까?
한국인에게는 '밥심'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심이 힘이 아니라 心은 아닐까? 우리가 먹었던 밥들에 너무 많은 마음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