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선택권과 책임을 강조하는 독일의 성교육
감자탕에 고기 좀 덜어줬다고 성관계에 동의했다고 판단한 재판정과,
반짝 얻은 인기를 여자들을 함부로 '후리는'데 썼던 가수 J의 1심 결과와,
말 그대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저지른 성남 어린이집 사건
등등 최근 뉴스를 접하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미는 와중에 문득 예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집 둘째는 독일에 오자마자 2년 동안 동네 유치원에 다녔다 (지금은 또 다른 학교에 다닌다)
독일어는 물론 우리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만 2세 11개월의 꼬꼬마에게 새로운 환경이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일어나면서부터 울고, 옷 입으면서 울고, 대문 앞에서 울고, 유치원 신발장에서 울고, 자기 전에도 울고... 꼬박 1년 동안을 매일매일 그렇게 울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오늘은 유치원 안가? 나 유치원 가고 싶어!'
거짓말처럼 이 녀석이 먼저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말문을 처음 텄을 때보다 오백 배는 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ㅠ_ㅠ)
그 이후로는 '너 자꾸 말 안 들으면 오늘 유치원 안 간다!'라는 협박(?)을 두려워할 정도로 유치원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독일 유치원은 나이대로 반을 나누지 않는다.
만 3세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인 만 6세의 아이들까지 모두 한 반에서 함께 논다. 뜻이 안 맞아 안 노는 경우는 있어도, 나이가 다르다고 친구를 안 하는 경우는 없다. 나이라는 계급장을 다 떼고 모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사실 누가 몇 살인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아이들도 다른 친구들 나이는 잘 모른다. 가끔 생일 파티가 열리면 "엄마, 누구는 오늘 4살이 됐대" 라며 그때서야 한 번씩 자각할 뿐이다.
그렇게 서로서로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을 배려하고 보호하며, 작은 아이들은 큰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함께 지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유치원에는 우리 둘째보다 두 살 더 많은 S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왕고 언니인 데다가 이 친구도 본인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언니가 있기 때문에 여느 둘째와 같이 눈치도 빠르고, 친구들을 살살 구슬리는 법도 안다.(세상의 이치를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달까)
기본적으로 유치원의 맏언니 역할을 하며 어린 친구들과도 잘 놀아주어 언제나 인기 만점인 아이였다.
하루는 둘째가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으며 여느 때처럼 재잘재잘 유치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오늘 S와 재밌는 걸 하며 놀았어"
"그래? 뭘 했는데?"
"낮잠시간에 다른 애들 다 잘 때 몰래 S랑 거기(!) 보여주면서 놀았다?"
오. 마이. 갓.
".... 어디서?"
"계단 뒤에 있는 비밀장소에서. S가 자기 꺼 먼저 보여줄 테니까 내 것도 보여달라고 했어. 쭈쭈도 보여줬어"
"선생님은 뭐 하고 있었어? 다른 친구들은 없고 너희들 둘만 있었어?"
"선생님은 없었어. 다른 애들은 자고 있었고"
"S가 만지기도 했어? ㅇㅇ이도 그게 재밌었어?"
"나는 안 만지고 S만 내 것 조금 만졌어. 아 몰라"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는데 해맑게 얘기하던 이 녀석,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꼈는지 더 이상 대화를 거부한다.
울화통이 터지려는 걸 억누르며 억지로 시간을 보내다 자기 전에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해봤다.
진술에 일관성이 있는 걸로 보아 지어내는 건 아닌 것 같고, 한 번만 일어난 일도 아닌 것 같다.
오 신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과 순수함과 무지함과 그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로부터 비롯된 행동이 때로는 얼마나 부적절 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보다가,
그나마 이게 이성 간에 일어난 일이거나, 더 심각한 행동이 아니었음에 위안 아닌 위안을 삼다가,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 고민하다가,
새벽 무렵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AA 선생님께,
항상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진지하게 한번 살펴 봐주셨으면 하고 이야기가 있어 편지드립니다.
어제 우리 ㅇㅇ가 집에 돌아와 S와 서로의 소중한 부분을 보여주며 재미있게 놀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주더군요.
처음 있던 일도 아닌 것 같아 선생님도 상황을 파악하고, 지도가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희 딸이나 S를 꾸짖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나이대는 다른 뜻 없이 자연스럽게 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딸에게도 소중한 부분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거나 만지는 게 아냐라고도 잘 타일러놓았고요.
그렇지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치원 차원에서도 아이들에게 잘 이야기해 주었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이번 일과 관련해 더 설명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ㅇㅇ엄마 드림
영어로 정성껏 작문한 후 번역기를 사용해 독일어로 바꾸고, (TMI : 번역기 이용 시, 한> 독 번역보다 영> 독 번역이 훨씬 정확하다) 오전에 아이를 등원시키며 선생님께 이메일을 확인해보시라고 부탁했다.
선생님 왈, 이미 메일을 봤다며, 자기가 한번 상황을 파악해 보고 다시 알려주겠다고 한다.
뻔하지 뭐.
소중한 곳은 함부로 보여주거나 만지는 게 아니야. 앞으로 그러면 절대 안 돼 라며 타이르는 정도.
딱 그 정도가 내가 기대한 전부였다.
아이들이 본능적인 호기심에 그랬던 건 나도 알겠고, 싫다는데 강제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면 안돼"라고 단순히 타이르는 것 왜에 여기서 선생님이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흘 뒤 답장이 왔다.
내 예상과는 다소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ㅇㅇ 어머님께,
이번 일에 대해 바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ㅇㅇ에게는 잘못한 행동이 하나도 없다, 친구와 그렇게 논 것도, 엄마에게 친구와 놀았던 일을 얘기한 것도 다 잘 한 행동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만 다음번에는 ㅇㅇ이가 동의하지 않는 행동을 친구가 하려고 하면 '안돼'라고 얘기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혹시 ㅇㅇ가 잘 모르겠거나 말하기 두려운 상황이면, 언제나 선생님들에게 말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S와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S는 ㅇㅇ이의 신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고 하더군요. 성별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 나이대 아이들이 남들의 신체를 궁금해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기 몸을 보여주고 남의 몸을 보려는 '놀이'도 종종 하고요. 그렇지만 동의 없이 함부로 남의 몸을 보거나 만지는 행위는 올바른 행위가 아님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S는 ㅇㅇ의 동의를 얻지 못했음을 사과했습니다. ㅇㅇ가 이런 놀이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오히려 ㅇㅇ는 자기는 싫지 않았었다고, 재밌었다고 말했고요.
면담 후에 아이들과 서로의 의사를 묻고 답하는 상황극(role play)을 해봤습니다.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연극을 즐겼고, 다음에는 놀기 전에 꼭 서로의 의사를 확인할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혹시 더 궁금하시거나 요청 주실 내용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항상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AA 드림
아니,
하면 안 돼! 그건 나쁜 거야!라고 따끔하게 혼내도 모자랄 판에, 뭐라고? 서로의 의사를 물어보고 동의를 얻지 못하면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다고? 뭘 물어봐 물어보긴, 아닌 건 아닌 거지.
처음엔 그렇게 분개하면서 다시 다다다 항의성 짙은 답장을 적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틀린 말도 아니다.
자기 의사를 밝힌다는 것,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
너무 당연한 절차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솔직히 아주 많이) 무시되는 행위이다.
특히 성(性)에 있어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건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어른이 돼서는 더더욱 필요한 일이다.
독일에서는 1992년부터 학교에서의 성교육이 의무화됐다.
주마다 시작 나이가 다르긴 한데,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성교육을 시작한다. 베를린에서는 만 5세부터, 다른 주에서는 만 7~8세(2~3학년)부터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가, 생식 기관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기능하는가 하는 생물학적인 차원부터, 성관계와 원치 않은 임신을 막기 위한 피임방법, 최근에는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슈까지 다양한 관점을 적나라한 방법으로 가르친다.
일부 학부모들은 너무 어린 나이부터 성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고 반대하기도 한다. 종교적 이유로 성교육을 거부하는 부모들도 있다. 이럴 경우 경고와 함께 벌금을 물게 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옥살이까지 할 수 있다. '부모의 종교적 신념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게 독일 정부의 입장이다.(2006년 대법원 판결)
독일 성교육의 목표는 사람들이 성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함양하고 자기 자신 및 상대방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개발하는 것이다.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self-determination)과 가치관의 개발을 지지하고, 궁극적으로 삶의 자조(自助)를 돕는데 중점을 둔다.
더불어 성교육으로 성병과 원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독일 10대 소녀의 임신율은 유럽 및 북미 국가와 비교해 봤을 때 최저 수준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왜 유치원 선생님이 '소중한 곳을 함부로 만지면 안 돼!'라고 하기보다 '상대방의 의사는 물어봤니? 싫다고 말했니? 언제라도 싫다고 하면 하지 않아야 해'라고 부러 둘러서 얘기했는지.
물론 우리 유치원 선생님의 대처방안이 백 프로 옳았다거나 전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아닌 건 아닌 거라는 따끔한 한마디가 필요하지 않았나라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여아끼리 장난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또 다른 류의 사건이 발생했으면 대응 방안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최근 일어난 성남의 어린이집 사건과는 직접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독일의 성교육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보호나 금지가 아니라 자기 결정권과 책임을 최우선으로 놓고 상대방 의견의 경청 및 수용을 강조한다는 점을 높게 살뿐이다.
그릇에 감자탕 고기를 덜어줬다고,
야한 옷차림으로 밤늦게 돌아다녔다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동의한 게 아니다.
막말로 서로 합의 하에 모텔에 들어갔다고 해도,
옷을 홀딱 벗고 침대에 함께 누워있었어도,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오'라고 한다면 그건 아닌 것이다.
내가 싫다는데, 거부를 왜 거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왜 내 의사를 남이 해석하는가? 왜 남이 내 마음을 결정하는가?
막상 사건이 터지면 '쟤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한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인지상정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건가?
첫째가 지금의 둘째와 비슷한 나이었을 때, 어린이집에서 이런 걸 배워왔었다.
"안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나쁜 아저씨가 못된 짓을 하려고 하면 외치는 마법의 주문이라고 했다.
실효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정작 험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무조건 내빼거나 조용히 있는 게 훨씬 있는 게 덜 다친다고 한다) '나쁜 아저씨'와 '못된 짓'의 범위도 다시 정의해야 할 것이다.
갈길이 매우 멀지만, 우선은 하나만 더해 가르쳐보는 게 어떨까?
"안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거절 의사를 표현하면,
"알았어, 미안해, 하지 않을게"라고 수용하는 것까지.
<참고 글>
SEXUALITY EDUCATION IN GERMANY: AN EFFECTIVE INTERVENTION TO SUPPORT THE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SRH) OF PEOPLE ACROSS THE LIFESPAN, Federal Centre for Health Education (BZgA), 2015)
'We have more freedom to teach sex in schools /the local.de
People being sent to jail for refusing sex-ed in Germany? / reddit
*커버사진 - 굿네이버스 아동성폭력예방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