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펠, 독일 푸드뱅크 이야기
독일어로 타펠(Tafel)은 '식탁'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뜻으로 티쉬(Tisch)라는 단어가 있으나, 이는 '탁자(table)'라는 보통 명사이며 접두사에 따라 약간씩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Esstisch는 식탁, Schreibtisch는 책상, Nachtisch는 침대 옆에 놓는 협탁을 뜻한다.
타펠은 독일의 푸드뱅크 이름이기도 하다.
푸드뱅크는 품질에는 이상이 없으나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포장 불량으로 상품가치가 떨어진 식료품들을 기증받아 저소득층에게 전달하는 복지전달체계다. 상품가치가 떨어졌다고 막무가내로 버려질 음식들을 활용함으로써 환경보호에도 일조한다.
타펠은 1993년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현재 전국적으로 940여 개소가 운영 중에 있다. 연간 160만 명의 사람들이 타펠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이들에게 제공되는 식료품은 한 해 총 26.5만톤에 달한다.
타펠은 지역사회를 기반(Community-based)으로 운영된다.
타펠은 비정부/비영리기관이며 대부분의 기부물품, 운영비용과 노동력은 해당 지역의 업체와 주민들로부터 충당된다. 지역 사회의 참여를 독려하고 해당 지역의 저소득층을 챙기는 것도 같은 지역 주민들이다.
전국적으로 6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연 2천만 시간을 할애해 타펠 운영을 돕는다. 약 1억 8천만 유로(2천3백억 원) 상당의 노동력을 기부하는 셈이다.
쉽게 말해 타펠은 동네 주민의, 동네 주민에 의한, 동네 주민을 위한 복지체계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옹벤져스'가 조금 더 조직화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려운 이들의 밥상을 위해 이웃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여차 저차 하여 우리 동네 타펠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올해 운영 12년 차를 맞이한 우리 지역 타펠은 이용자가 직접 찾아와 장을 보는 형태의 푸드마켓이다.
일주일에 3회 문을 여는데, 개장 당일 또는 그 전날 마트, 베이커리, 양계장 등 총 34개의 지역 기부처에서 다양한 물품을 기증받는다. 수거 물품의 종류 및 수량은 그날그날 다른데 보통 과일, 야채, 빵, 계란에서부터 우유/버터와 같은 유제품, 통조림, 파스타면 등 식료품이 대부분이다.
연간 총 150톤 분량(약 30만 유로, 4억 원 상당)의 식료품들을 700가구(2,100명)에 제공한다.
내가 맡은 역할은 간단했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이미 수거해 온 식료품들을 알맞게 분류해 놓는 것.
선배(?) 자원봉사자의 안내에 따라 처음에는 빵 코너, 다음에는 과일코너, 마지막으로 야채 코너에 투입됐다. (달걀 코너는 비교적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해서 아쉽지만 참여하지 못했다ㅎㅎ) 식료품들의 유통기한과 신선도를 확인한 후 종류별로 구분해서 바구니에 보기 좋게 담아놓으면 준비 끝!
규모는 작지만 알찬 마켓이 세워졌다.
모든 준비과정의 핵심은 '위생'이다.
위생은 손을 씻고 앞치마와 장갑을 장착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통기한이 지났거나(당일 포함) 신선도가 조금 떨어진다 싶은 식료품들은 얄짤없이 쓰레기통행이다.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미관상 좋지 않은 물품들은 한편에 따로 모아놓는다. 고객들은 이를 인지하고 직접 이용 여부를 결정한다.
이제 '고객'들을 맞이할 차례다.
실업자, 연금수령자, 편모/편부가정, 난민 등 주요 고객은 저소득층 지역주민들이다(지역 특성상 우리 타펠은 난민 이용률이 17%로 가장 높다).
타펠과 연계되어 있는 지역 민간단체에 신청하면 심사를 거쳐 이용 가능 여부 및 횟수가 결정된다. 주 1회 이용이 기본이며, 다자녀(3자녀 이상)의 경우 주 2회까지 이용 가능하다. 총 이용기간은 1년이다.
이용자들은 상징적인 비용(1~2유로)을 내고 준비된 식료품을 마음껏 담는다. 단, 유제품, 계란 등 인기가 많은 제품군들은 구매한도가 정해져 있기도 한다.
신선한 식료품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적어도 일주일간은 '먹고 살 걱정' 없이 생활할 것이다.
타펠은 그들의 '밥상' 그 자체다.
누가 나에게 "네 소원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배 곪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입에 풀칠은 할지언정 거미줄을 치는 사람은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는 적어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만은 굶어 죽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감히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양식을 빌어봤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백범과는 달리, 나는 막연한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 지금까지 한 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유별나게 더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거나(설마!) 도덕심이 더 강하다거나,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게 아니다. 나는 남들 만큼의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때로는 지극히 이기적인 보통 사람이다. 그저 부모를 잘 만나 태어난 까닭에 아직까진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운 좋은 사람일 뿐이다.
5년 전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사건에 이어, 얼마 전에도 성북 네 모녀 사건이 발생했다. 생활고에 의한 안타까운 죽음이다. 21세기에 들어섰는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한 나라인데, 다른 이유도 아닌 굶어 죽는 경우는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뉴스 들으려고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나 자괴감마저 든다.
현대판 '장발장' 사건들도 솔찮게 보도된다. 며칠 전에는 동네 슈퍼에서 사과 몇 쪽을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부자(父子)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다행이 이 사건은 훈훈하게 마무리된 듯 하다.
하지만 비유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먹고 살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얼마나 많을까. 모든 이들이 매 끼니때마다 걱정 없이 따뜻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는 그날은 언제쯤 올까.
덧, 우리나라에도 푸드뱅크가 있다.
보건복지부 주관으로 전국적으로 470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98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벌써 20년 이상 됐다. 기초수급자, 차상위계층, 긴급지원대상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데 이용 범위가 월 1회, 5개 품목에 한한다. 얼마나 실효성 있는 전달체계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