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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Dec 31. 2019

새해를 맞이하는 독일인들의 자세

불꽃놀이와 디너포원 없는 질베스터는 앙꼬 없는 찐빵!

독일 사람들은 새해 전 날, 즉 New Year's Eve를 질베스터(Silvester)라고 부른다.


한겨울 은(Silver)처럼 반짝이며 내리는 눈을 상징하는 단어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12월 31일에 선종했던 4세기 인물, Sylvester 교황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게다가 독일어로 은(銀) 은 Silver가 아닌 Silber라고 쓴다).


아무튼 예쁘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날, 여느 때 보다 더욱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은 이 날, 독일은 해질 무렵부터 불꽃과 소음으로 가득하다.




불꽃놀이(Feuerwerk)


새해 전야의 불꽃놀이는 본래 악령들을 퇴치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요즘엔 굳이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하게 불을 붙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회는 찬스니까 하는 것일 뿐(불장난은 언제나 재밌다!)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독일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관대해진다. (비)공식적으로 소음을 용인해주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독일은 위험 정도에 따라 폭발물을 4등급(Klasse)으로 구분하는데,  Klasse 1은 보통 생일 파티에서 터뜨리는 폭죽이나 스파클러로 웬만한 상점에서 판매하고 12세 이상이면  누구나 살 수 있다. Klasse 2는 콩알탄, 폭음탄, 연발탄, 로켓탄 등 어렸을 때 한 번쯤은 가지고 놀았을 법한 폭죽부터 이름은 모르지만 보기만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폭죽까지 포함된다. 2등급 폭죽도 일반 마트에서 판매하는데, 판매 기간은 연말 3일간(12월 29일, 30일, 31일)으로 제한된다. Klasse 3과 4는 전문가만 다룰 수 있으므로 패스.


올해는 29일이 일요일이라 28일부터 판매 시작!


12월 31일, 어스름이 해가 질 무렵부터 집 앞에서, 공원에서, 길거리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온 동네서 뻥뻥 폭죽 터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해가 바뀌는 1월 1일 00시에는 시/도 차원에서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불꽃놀이를 진행하는데, 직접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불꽃놀이 현장은 바로 광란의 도가니, 무법천지가 따로 없다고 한다.


매해 00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열리는 불꽃놀이


일 년에 단 하루, 추억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재미있는 불꽃놀이를 할 수 있는 날이지만 부작용이 만만치가 않다.


안전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독일 베를린 지역신문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에 따르면 2017년 12월 31일 밤 사이에  3천 건이 넘는 응급전화가 걸려왔다고. 베를린 지역 병원 한 군데서만 21명의 폭죽 부상자가 실려왔고 그중 5명은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소방차는 1580번 출동했고, 400건에 이르는 화재를 진압했다. 이날 폭죽놀이로 베를린에서만 두 명이 죽었다.


나도 독일 이주 첫 해,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보겠다고 불꽃놀이를 하다가 큰일 날 뻔한 적이 있다. 뒤늦게 찾은 마트에서 딱 하나 남아있던 폭죽을 어쩔 수 없이 샀는데, 그 모양새가 흡사 람보가 몸통에 걸고 다녔던 총알다발처럼 생겼더라.


점화를 어디에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한참 연구하다가 대충 불을 붙였는데 순식간에 굉음을 내며 사방팔방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해 온 가족이 혼비백산 도망치는 촌극을 벌였다. 가장 반사 신경이 늦었던 내가 목덜미에 불꽃을 맞아 경미한 화상을 입었었는데, 조금만 비껴 맞았더라도 저 세상 사람이 될 수 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작년에는 그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아주 얌전히 동네 공원에서 콩알탄을 던지며 놀았다. 훨씬 재밌었다.)


불꽃놀이는 대기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도 얻고 있다.


불꽃이 발사될 때 납, 바륨, 크롬, 다이옥신, 이산화탄소, 질소, 황산화물 등과 같은 중금속으로 이뤄진 독성 물질이 배출되는데, 이들은 약 2주 이상 대기 중에 머무른다. 주요 독일 도시에서 1월 1일 측정된 미세먼지 농도는 유럽 연합(EU) 기준치(50㎍)의 적게는 10배, 많게는 30배에 달한다. 차량에서 배출되는 1년 치 미세먼지의 15%에 달하는 수치다.


중국에서 춘절에 시행하는 불꽃놀이 때문에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농도가 올라간다는 썰이 있었는데 신빙성이 있는 얘기였다!



새해 아침, 동녘이 밝아오면 불꽃과 소음은 잦아들고, 광란의 밤을 보낸 독일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특유의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 잔해와 여파는 이후 며칠 동안이나 길거리 여기저기서 목격될 것이다.



밤새 마시고 놀다 빈 술병을 동상에게 기증(?)하고 떠난 뒤셀도르프 청년들





'디너 포 원' 없이 새해 전야도 없다 (Kein Silvester ohne Dinner for One)



'디너 포 원'은 반세기에 걸쳐 독일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TV쇼다. 1963년부터 간헐적으로 방영되다가 1972년부터는 한해도 빠짐없이 매해 마지막 날 독일 시청자들의 안방을 찾는다. (90년작 '나 홀로 집에' 케빈은 아직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한 사람을 위한 저녁'이라는 제목의 18분짜리 짧은 흑백 프로그램은 충실한 집사 제임스(James)가 미스 소피(Miss Sophie)의 성공적인 생일파티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90세 생일을 맞이한 미스 소피는 여느 때처럼 4명의 친구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게 함정. 집사 제임스는 음식 서빙은 물론 부재중인 손님들의 역할을 대신하며 각 코스 사이에 제공되는 와인까지 몽땅 해치워야 한다.


점점 취해가는 제임스가 끝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과 매 식사 코스를 마칠 때마다 반복되는 대사가 이 촌극의 포인트.


"작년처럼 말인가요, 미스 소피? " "매년 똑같이 말이네, 제임스!"


'디너 포 원'은 본래 영국 극작가인 로리 와일리(Lauri Wylie)의 작품이다. 1962년 페터 프랑켄펠트(Peter Frankenfeld)라는 독일 방송 프로듀서가 영국의 한 카바레에서 이 연극을 보게 된다. 히트를 예감한 프랑켄펠트는 영국 배우들에게 자신의 라이브 TV쇼(Guten Abend, Peter Frankenfeld)에서 연기해주길 청했고, 1963년 첫 전파를 탄 쇼는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후 이 영화는 18분짜리 오리지널 버전뿐만 아니라 11분짜리 편집본과, 다양한 리메이크, 패러디물을 양산하며 독일을 넘어 오스트리아, 스위스, 북유럽 국가 등 주변국부터 호주, 남아공에서까지 방영되고 있다(정작 영국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건 안 비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반복 상영된 TV 프로그램으로 기네스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집사 역할을 맡은 영국 코미디언 프레디 프린턴(Freddie Frinton)은 안타깝게도 '디너 포 원'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기 전인 1968년 유명을 달리했다.


앨레강스한 미스 소피 역의 메이 워든(May Warden)은 1979년 8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4명의 자녀를 함께 낳고 키운 그녀의 남편 이름이 Silvester이었다고 하니, 이건 과연 운명이 아니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BN9edpdCH7c

11분짜리 Dinner for One





새해 다짐


우리 가족은 독일에 온 이후 '질베스터' 저녁에 한자리에 모여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 다짐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A4용지를 접고 접어 칸을 8개 만든 다음, 제일 위에는 본인의 이름을, 남은 7개 칸에는 그해 다짐을 적는다.


이 중 5개는 자기 자신이 바라는 다짐을 적고, 나머지 2개는 다른 식구들에게 자신한테 바라는 소원을 적게 한다. 그런 다음 매일매일 다짐을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항상 드나드는 현관문에 붙여놓는다.


지나간 해에 했던 다짐은 식구들의 엄정한 판결을 거친다. 동그라미(O)는 잘 지켜진 것, 세모(△)는 노력은 했으나 아쉽게도 달성에는 못 미치는 것, 엑스(X)를 받은 다짐은 실패한 것이다. 엑스 표시를 받은 다짐은 이듬해로 이월된다. 약 절반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왼쪽부터 둘째, 첫째, 그리고 내 2019년 다짐들..


거창한 다짐은 없다. 다만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해봄직한 것들로만 리스트를 메꾼다.


가령 나의 2019년도 다짐은 1) 다치지 않고 건강하기, 2) 독일어 공부하기 3) 화내고 소리 지르지 않기 4) 독일 경험을 글로 남기기, 5) 매일 저녁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 등이었다. 달성률은 약 절반 정도다. (3번 다짐은 새해 둘째 날부터 싹수가 노랬다. 반성합니다)


큰 아이 역시 1) 다치지 않고 건강하기, 2) 자기 의견 똑바로 말하기, 3) 장거리 여행 시 불평하지 않기, 4) 스스로 할 일 꾸준히 하기(대부분 문제집 풀기, 5) 영어와 독일어 클래스 레벨업 하기 등이었는데 역시 절반만 성공이다.


2020년도 다짐 성공률도 50% 전후에 머무를 것 같다. 마음먹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르니까.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실천해 봐야겠다.


새해 가장 첫 번째 다짐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즐기기'로 할 작정이다. 이 곳에서의 생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독일 새해 인사말은 뭘까?


Frohes Neues Jahr, Prosit Neujahr, Gesundes Neues Jahr, Gutes Neues Jahr 등 '행복한/좋은/건강한 새해 되시라'는 다양한(뻔한) 인사말이 있지만, '구텐 루취(Guten Rutsch)'라는 독특한 인사말도 있다.


직역하면 '잘 미끄러지라'는 뜻으로, 새해에는 모든 일이 매끄럽게 잘 풀리길 기원하는 것이다.


독자님들도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2020년이 되시길!





<참고 글>


The Dinner for One Film- A German New Year’s Eve Tradition / german girl in america

독일의 새해 전야 실베스터 / 한솔씨의 즐거운 인생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독일인들이 가장 즐겨 보는 영국 촌극 / 괴테 인스티튜트

대기오염 유발하는 불꽃놀이, 떠오르는 대안은? / 에너지설비관리

10 German traditions on New Year's Eve / d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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