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의 제일은 카니발이더라
'독일 생활은 어때?'
수많은 지인들이 물어볼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좋아... 그런데 심심해 죽겠어.'
사십 평생의 대부분을 북적이는 도시에서 살았던 나에게 이 곳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온한 곳이다.
처음 몇 달간은 풀내음이 가득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자연친화적인 이 곳이 천국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공원에서 유유히 산책하는 노부부와 인형같이 예쁜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한가로이 끄는 엄마들, 저녁을 넘어서 오후가 있는 삶을 사는 여유로운 사람들을 보며 나도 이 생활에 금방 동화될 줄 알았다.
평소에도 웬만에서는 큰 소리가 나지 않는 이 동네는 (우리 동네에서 내 목소리가 제일 크다. 애들 잡느냐고) 해가 지면 그야말로 적막에 휩싸인다. 새해 전야를 제외하고는(<새해를 맞이하는 독일인들의 자세> 참조) 일 년 364일이 고요하다. 막말로 평화로운 지옥이 따로 없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 마을이라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어쩌다 한 번씩 가는 프랑크푸르트 시내 모습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다. 물론 동네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고 분주하긴 하지만 서울과 비할 바가 못된다. 밤이 되면 고요해지는 건 매한가지. 누가 불야성 가운데서 음주가무를 즐겨왔던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랄까 봐 좀이 쑤셔 죽겠는데...
와아. 독일 사람들 진짜 재미없어. 하루하루가 다 똑같아.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거지?
독일은 자동차, 맥주, 그리고 박람회(Messe)의 나라로도 일컬어진다.
대규모의 산업 전시회나 크리스마스 마켓 말고도 독일 전역에서 한 해 동안 열리는 전통 축제(Volksfest)만 9,9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서도 한 달에 한번 꼴로 다양한 축제가 개최된다.
부활절 축제, 마틴 축제, 크리스마스 마켓 등 주요한 시즈널 행사에서부터 딸기축제, 와인축제, 사과축제, 도자기축제, 식도락 박람회, 벼룩시장, 미술/음악축제, 골동품 시장, 가을축제까지...
Fest(축제), Markt(장터), Messe(박람회) 등 행사를 지칭하는 용어는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매한가지다.
구시가지(Altstadt)와 광장(Platz)을 중심으로 와인, 맥주, 소시지, 감자 등의 먹거리와 의류, 미술품, 장식품 판매 매대들이 세워지고 어린이/가족 나들이객을 위한 풍선, 페이스페인팅 등의 이벤트 부스도 마련된다. 거창한 건 없다. 그저 골목골목을 구경하다 소시지와 맥주 한잔씩 사 먹고 도란도란 수다를 떨다 오는 게 전부다.(축제마저 심심할 줄이야!)
어떻게든 심심함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이 수많은 축제들을 탄생시킨 게 아닌가 싶다. 정기적으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무언가 시간을 때울 거리를 부러 만드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신났던 축제다운 축제는 매년 초에 열리는 카니발(Karneval)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리우 카니발? 베네치아 카니발? 독일엔 쾰른 카니발!
'카니발(Karneval)'은 '고기(carne)' '안녕(vale)'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가톨릭에서는 사순절(四旬節, 부활절까지 주말을 제외한 40일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을 기리기 위해 금욕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갖는데, 그전까지는 마음껏 먹고 마시자는 목적이 담겼다.
카니발은 지역에 따라 파싱(Fasching, 남부 독일) 또는 파스트나흐트(Fastnacht, 중부 독일) 등의 명칭으로도 불린다. 금식(Fasten)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육제(謝肉祭), 즉 고기 먹는 걸 감사하는 기간'이라고도 해석한다.
유래가 어찌 되었을지언정, 현재의 카니발은 종교색 없이 모두가 즐기는 축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개천절을 기린다고 모두 천도교인이 아니지 않은가)
보통 세계 3대 카니발로 브라질 리우, 이탈리아 베니스, 그리고 프랑스 니스의 카니발을 꼽는데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독일 카니발도 명함을 내밀 수 있겠다. 특히 쾰른, 뒤셀도르프, 마인츠 등 독일 중서부의 라인강 지역의 동네들에서는 유서깊은 카니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일 카니발은 '라인(Rhein) 카니발'로 대표된다.
그중에서도 제일로 꼽히는 건 단연 쾰른(Köln) 카니발이다. 1823년, 최초로 카니발 행진이 시작됐다.
수많은 독일 여행 책자에서도 설명이 빠지지 않는 쾰른 카니발은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이어 제5의 시즌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매년 11월 11일 11시 11분*을 기점으로 '알라프(Alaaf)**'라는 외침과 함께 카니발 시즌이 선포된다.
*숫자 11은 독일어로 엘프(elf)라고 하는데 이는 '작은 요정'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또한 11이라는 숫자는 예로부터 완벽한 수 10을 망치는 '이상한 놈'으로 취급받았었다고 한다. 11월 11일은 가톨릭 성인 마틴 데이(St. Martin Day)이기도 하므로 이러나저러나 축제 분위기다.
**알라프(Alaaf)는 독일 고어(古語)로 '(쾰른 외) 모든 다른 것은 뒤떨어진다(alles andere fällt ab)', 즉 '쾰른이 최고다'라는 의미다. 당연히 쾰른에서만 쓰는 인사말이다. 다른지역에서는 헬라우(Helau)를 외친다
실제 본격적인 카니발 행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내고 나서인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주님이 나타나신 날)인 1월 6일부터 시작된다.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계속되다가 2월 중순~말경 사순절 직전의 일주일 동안은 제대로 축제를 즐긴다. 그래서 이 기간을 광란의 날(Crazy Days)이라고도 일컫는다.
광란의 날들은 여인들의 목요일(weiberfastnacht)부터 시작해 검은 금요일 (Rußiger Freitag), 카네이션의 토요일(Nelkensamstag), 튤립의 일요일(Tulpensonntag)을 지나 장미의 월요일(Rosenmontag)에 절정을 이루었다가 참회의 화요일(Fastnachtsdienstag) 또는 제비꽃 화요일(Veilchendienstag)에 마감된다.
그래서 카니발에서는 뭘 하는데?
라인강 줄기에 발을 걸치고 있는 우리 동네에서도 카니발은 연중 주요 행사 중 하나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은 축제 기간 중 반드시 하루는 분장한 상태로 학교에 등교해 전통 간식인 베를리너(Berliner, 던X도너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잼이 들어간 도너츠)를 나눠먹는다. 핼러윈과도 매우 흡사하다.
하이라이트는 카니발 행진(Karnevalszug)이다.
쾰른 등 대도시의 축제 규모와는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마을 단위에서도 꽤나 공들인 퍼레이드를 즐길 수 있다. 지난해 잠깐 구경이나 해볼까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을 찾았다가 200개가 넘는 팀들의 화려한 분장을 보는 재미에 빠져 두 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뜨지 못한 적이 있다.
구경꾼들 역시 퍼레이드의 일부다. 코스튬을 차려입고 행진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목청이 터져라 "헬라우(Helau)*"를 부르짖으면 행진하던 사람들은 사탕과 초콜릿 등을 던져준다(때때로 어른 참가자를 위한 술까지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으스스한 야외 날씨에 견디기 위한 핫팩과 달달구리를 담을 수 있는 봉투는 필수. 끝이 없어 보이는 행렬을 맞이하며 자기 앞에 떨어진 사탕을 줍다 보면 거짓말 조금 더 보태 일 년 치 간식은 다 해결될 정도다.
*쾰른 외 다른 지역에서는 '헬라우(Helau)'라고 인사한다. 할렐루야(Halleluja), 하늘색(Helblau), 안녕(Hallo) 또는 겨울을 여는 북쪽 여신의 이름(Hel)에서 유래됐을 거라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한 어원은 불분명하다.
아이들은 간식을 모으는 재미가 가장 클 테지만, 어른들에게는 행진을 지켜보는 재미가 더욱 크다.
실로 다양한 단체 및 동호회(Verein)가 행렬에 참여한다. 카니발 행진만을 위한 동호회가 따로 있을 정도다. 행진 팀들은 유니폼을 맞춰 입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짧은 연극을 한편 선보인다. 정치 풍자를 하거나 사회 이슈를 반영하는 팀들도 많다.
*사진출처 : Deutschland.de, thelocal.de
예년보다 더 일찍 찾아온 고난 주간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날 종려나무를 태운 재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긋는 예식을 거행하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세기 3:19)'는 말씀을 되새긴다. 결국 흙으로 돌아갈 인생, 죽음 앞에 겸손하며 참회하라는 뜻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불교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종교는 달라도 좋은 말씀은 매한가지다.
또 이날부터는 언제 축제를 즐겼냐는 듯 예의 그 어둡고 침울한 고요하고 정적인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에 동참하며 부활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올해는 더욱 일찍 그 고난의 시간이 시작된 듯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몇몇 카니발 행사들이 취소되었고, 지난 일요일에는 독일 북서부 일대를 덮친 태풍 율리아 때문에 주요 도시의 일요일 카니발 행진이 전부 무산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로젠몬탁 행사는 그대로 진행됐다)
고난의 기간이 더 일찍 찾아온 만큼, 이 쓸쓸한 겨울도,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역병과도 더 빨리 이별했으면 좋겠다. 연초부터 전 세계가 이리도 액땜을 세게 하고 있는 걸 보면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정말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 없다. 꼭 그래야만 한다.
아, 독일어로 사순절은 'Lenz'다. '봄'이라는 뜻이다.
봄아 빨리 오너라.
<참고글>
Fasching and Karneval / German-way.com
독일 카니발, 다른 카니발과는 다른 이유 /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11-11-11-at-1111-oclock/claredunkel.com
Volksfeste in Deutschland: Tradition für Millionen Besucher
‘It's absolute chaos’: Does Düsseldorf host Germany's best carnival celebration? / the local.de
사순절과 사육제 / 줄리아의 친절한 미술관
Carnival celebrations called off in Cologne, Düsseldorf due to .../ dw.com
제5의 계절, 독일 카니발의 시작 / german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