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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Mar 12. 2020

내 이름은 김말자, 나는 광부의 아내입니다

독일의 한국인 #2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 장소, 상황은 일부 각색했음을 밝힙니다.


1.

내 이름은 김말자. 참 세련된 이름이지?


57년생 닭띠니 한국 나이로 올해 예순넷이 됐네. 하지만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호적에는 59년생으로 되어 있어. 두 살 벌어 좋지 뭐. 


9남매 중 다섯 째로 태어났어. 이름대로라면 내가 막내여야 하지만, 내 밑으로 동생들이 넷이나 더 있어.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큰 언니와 큰 오빠는 배가 달라. 뭐 예전에는 이런 일이 많았으니까. 그나마 큰 오빠는 6.25 동란 때 돌아가셔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어.


내 고향은 전라도 순천이야. 우리 아버지는 '순천의 허준'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한의사였지. 그 옛날에 중국에서 공부까지 하고 오셨었대. 할아버지도 한의사셨어. 말하자면 대대로 한의사 집안인 셈이지. 그래서 집이 아주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하진 않았어. 일하는 분들도 세 명인가 있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워낙 베푸는 걸 좋아하시는 양반이라 정작 버는 돈은 없었어. 

대문 앞에 "돈이 없어도 아픈 자, 배고픈 자는 들어오십시오"라고 써 붙여놓으셨던 게 아직도 기억나. 


환자가 오면 그냥 보낼 수가 있나, 우리 집이 마당을 중심으로 우채, 본채, 사랑채 이렇게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랑채는 거의 아픈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어. 


돈을 안 받으니 어떻게 먹고살았냐고? 있던 땅마지기 하나둘씩 팔아서 충당했어.

술 담배도 좋아하시고 발이 넓으셔서 집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어. 엄마가 많이 고생하셨지.


우리 엄마가 엄청 알뜰하신 데다가 솜씨가 좋으셔서 직접 물레를 돌려 여름엔 삼베, 겨울엔 면에다 솜을 누벼 우리 형제들 옷은 모두 직접 만들어주셨어.  



2. 

난 항상 공부가 하고 싶었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내가 좀 영특했어. 다섯 살쯤에는 언니 오빠들 어깨너머로 천자문이랑 한글도 혼자서 깨쳤지. 그렇지만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공부를 길게 시킬 마음이 없으셨어. 당시 시골에서는 중학교만 나와도 선생님을 할 수 있다고, 나한테도 그러라고 하셨지.


열두세 살쯤이었나, 고창에 사는 사촌 이모가 중학교 공부를 시켜준다고 하길래 혹해서 그 집으로 갔어. 이모네가 엄청 부자였거든. 그 동네에서 그 집 땅을 밟지 않으면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지. 쌀농사도 짓고, 가게도 하시고, 가게 옆에 탁구장도 운영하셨어.


그런데 공부는 무슨, 10남매가 있었던 그 집에서 식모살이만 하다 왔어. 청소도 하고, 가게도 보고, 애들도 보고, 새참 배달도 하고…


맨날 아팠어. 가끔 쓰러지기도 했을 정도였지. 진짜 못됐었어 이모가. 남녀차별에, 며느리 차별에, 자식 간 차별에.. 그래도 재산이 많으니 자식, 며느리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비위를 맞춰드렸지. 


2년 정도 지나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나 좀 데리고 가달라고 바로 위 오빠한테 몰래 편지를 썼어. 

그동안 고생한 대가는 쌀 4짝뿐이었지. 돈으로 주지도 않더라.


 

3. 

나 데리러 왔던 우리 오빠는 스물둘에 장가를 갔어. 


새언니는 나랑 동갑이었으니 당시 열일곱이었지.  우리 언니들도 다 열일곱만 되면 아버지가 시집을 보내버렸어. 내가 공부한다고 버티지만 않았으면 나도 그 나이에 시집을 갔었을 거야. 


사실 오래 버티진 못했어. 열아홉에 결국 시집을 가게 됐거든. 호적상으로 하면 나도 열일곱에 간 셈이긴 하네.


남편은 같은 고장 사람이었어. 

아주 같은 동네는 아니었고, 우리 집에서 산 하나 넘으면 나오는 동네에 살았어.

아무도 못 고친다는 큰 병에 걸리신 시아버지를 우리 아버지가 살려내셨대. 그게 인연이 되어 친구처럼 지내다 사돈까지 맺게 된 거지.


우리 남편은 인물도 좋고, 인정도 많고, 효심도 깊고,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었어.


7남매 중 맏이였던 우리 남편은 중학교까지 밖에 못 다녔어. 집안 식구들 먹여 살리는 게 급했거든. 우리 결혼하기 전에는 월남 파병까지 다녀왔었대. 광부로 독일에 가게 된 것도 다 돈 때문이었어.


시댁이 원래는 부자였는데, 점점 가세가 기울어 내가 시집갔을 당시에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였어. 당장 먹을 곡식 한 톨이 없어 시어머니랑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허드레 일 좀 해주고 끼니를 얻어와 때웠던 기억이 나. 


남편은 49년 소띠, 결혼 당시 스물일곱이었어. 당시 5살밖에 안됐던 막내 시동생은 우리가 독일로 떠나올 때 겨우 중학생이었지.


 

4. 

결혼한 이듬해인 76년에 큰 딸을 낳았어. 


남편은 이듬해에 독일로 떠났지. 광부 파독 막차*를 탄 거야.

* 공식적인 첫 광부 파독 시점은 1963년이며, 간호사 파독은 1966년부터 시작됐다. 석유 파동 및 외국인 근로자로 인한 사회 문제로 독일이 인력 수급 중단 결정을 내린 1977년까지 독일에 간 한국인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둘째를 임신한 지 겨우 3개월, 입덧이 막 시작될 때였지. 그때 닭을 넣고 푹 끓인 미역국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형편이 안돼 결국 못 먹었던 게 지금까지 사무치네.


남편은 자기 용돈 100마르크 정도를 제외하고 매달 시댁으로 돈을 보내왔어*. 그 돈으로 시댁에선 시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땅도 샀지. 79년에는 한국으로 첫 휴가를 나왔는데, 500만 원**이나 들고 왔어 월급 가불 하고, 동료들에게 빌리고 해서 힘들게 만들어 온 돈이었어.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1965년부터 10년간 고국에 송금한 외화는 총 1억153만 달러로 총 수출액 대비 1.6∼1.9%(1965∼1967년 경우)에 달했다.
**당시 집 한 채 가격이 약 1,200만 원이었다고 한다.


시댁에서는 남편이 만날 큰돈을 가져다주니 돈을 쉽게 긁어모으는 줄 알았지. 땅 속으로 1,000m나 들어간 곳에서 그렇게 고생하는지도 모르고... 

남편이 첫 3년을 보냈던 광산은 루르(Ruhr)* 지역에서도 가장 위험하다고 소문난 곳이었거든. 죽는 동료들도 많았어.


*루르(Ruhr) - 독일 북서부 노드라인 베스트팔렌(Nordreine-Westfalen) 주에 위치한 강이자 산업지구 이름. 에센(Essen), 오버하우젠(Oberhausen), 뒤스부르크(Duisburg), 도르트문트(Dortmund) 등 여러 도시를 포괄한다. 라인강의 기적은 루르 지방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말할 정도로 독일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이 곳의 석탄사업은 한때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81년 3월 24일. 

날짜를 잊어 불지도 안 해.


내가 두 아이와 함께 독일 땅을 밟은 날이야. 올해로 딱 40년이 됐네.


처음 3년간의 계약*은 끝났지만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에 독일에 남아있기로 결정했어. 

한국에서의 가난도 지긋지긋했고, 아이들에게는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을 시키고도 싶었거든. 우리 큰 딸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똑똑하고 활달했던지 만날 입버릇처럼 서울대 보내 외교관 시키자고 했었거든.

*파독 근로자들의 계약은 3년 한시 근로 조건이었으나 기간을 채운 근로자 가운데 상당수(약 40%)는 잔류를 택했다. 현 독일 동포의 대부분이 이들과 이들의 후손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나머지 30%는 미국, 캐나다 등 제3국으로 이민했고 약 30%는 귀국했다. 


떠나는데도 우여곡절이 많았어. 우리 식구들이 독일로 떠나면 매달 남편이 부쳐주던 돈이 끊길게 뻔하니까, 시댁에서 우리를 볼모 삼아 당시 돈 300만 원을 요구한 거야. 


너무 과한 요구에 남편은 '그럼 거기 두소, 난 여기서 새 살림 차리면 된다'며 잠시 연락을 끊어버렸어. 보다 못한 시동생이 그냥 곱게 보내주자고 시부모를 겨우 설득했는데, 효자 남편이 그 사이에 어떻게 돈을 또 마련해서 보내버렸지 뭐야.


다 빚이었지. 빚 갚느라 오래 고생했어. 



5.

여전히 어려웠지만 우리 네 식구 행복하게 살았어.


남편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광산에서 작업반장(Meister) 자리까지 올라갔어.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집에도 살 수 있었지. 국위 선양했다고 나라에서 주는 표창장도 받기도 했어. 


온 동네 일은 도맡아서 했어. 

주말마다 가족 없이 홀로 살고 있는 동료들 챙겨준다며 집으로 초대했고, 일요일에는 교회 활동도 열심히 했어. 어떻게 보면 우리 아버지와도 비슷한 성격이었지. 어려운 사람, 외로운 사람 그냥 못 지나치는...


그러다 86년에 늦둥이가 생겼어.  

우리 남편이 독일에 온다고 큰 딸이랑 큰 아들이 아기였을 때를 못 봤잖아. 늦둥이 아들이 얼마나 예뻤겠어. 우리 집이 4층이었는데, 퇴근 시간쯤 되면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저 밑에 1층서부터 들렸다니까? 그거 좀 몇 분 늦으면 어떻다고… 오래 못 볼걸 알고 계셨던 걸까?


나도 우리 남편이랑 같이 산 기간만 치면 십 년이 채 안돼.



6.

92년 6월에 사고가 났어. 


막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돌에 깔린 거야. 척추를 다쳐서 반신마비로 6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있다 결국 돌아가셨어. 


그런데 돌아가실 당시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소문이 났어.

우리 남편 그럴 사람 아니야. 그렇게 책임감 있는 사람이 절대 그럴 리 없어.


광산 일이 너무 힘드니까 어떤 사람들은 보험금으로만 먹고살려고 일부러 자기 몸 해치는 사람들도 있었어. 손가락 절단하고, 다리 상하게 하고, 한쪽 눈 실명시키면서... 


이 사람들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만약 일하기가 힘들었으면 그런 방법을 쓸지언정, 자살할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지 우리 남편이.


제대로 항변하려면 변호사를 사야 하는데, 그 돈이 없었어.

더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믿었던 직장 동료들도, 교회 사람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다 등을 돌렸던 거야. 회사에서 해고당할까 무서워서 그랬는지, 형님 동생 하던 사람들도 누구 하나 나서 주는 사람이 없더라. 한마디 진술이라도 해줬으면 오해가 풀렸을 수도 있는데..


당시 독일 산 지 십 년이 넘었었지만 내가 사는 게 바빠 그동안 독일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었어. 

경찰, 병원, 회사… 여기저기서 조사하고 서류가 날아오고 하는데, 처음엔 발 벗고 통번역 도와주겠다던 교회 목사도 어느 순간부터 외국에 선교활동 나갔다고 연락이 끊기대? 우리 남편이 사람들 끌고 다니며 일으키다시피 했던 교횐데… 결국 얼마 안가 문을 닫더라.


보험판매하는 동료들 도와주는 셈 치고 들어 놨던 생명보험, 상해보험도 꽤 됐었는데 소용없게 됐어. 자살로 결론이 나는 바람에 한 푼도 받은 돈이 없어.



그때 생긴 화병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어. 


평소에는 괜찮은데 흥분하면 혈압이 높아져서 가끔 쓰러져. 심장에 피가 잘 안 돈다고 하네. 앰뷸런스 부른 적도 몇 번 있어. 


지금도 가끔 한 번씩 감정이 폭발하면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기도 해. 우울증이라고도 하던데 난 그 말도 정신병자 취급받는 거 같아서 싫더라. 그냥 화병이라고 해줘.



남편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내 두 손을 꼭 잡고 이런 말을 하셨어.


"당신 손이 백만 불짜리 손이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 많았어.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고생 안 시키려고 했는데 미안해."


내가 간호사*만 됐었어도 우리 남편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억울하게 가셨어. 불쌍한 양반.



7.

도둑질과 살인 빼고 돈 되는 건 정말 다 해봤어.


양말 공장, 인쇄소, 양로원... 가장 최근까지 다녔던 과자 공장에서 제일 돈을 많이 벌었지. 

친구가 아시아 식당을 운영했었는데 거기에 김밥도 납품했었어. 매일 새벽부터 김밥 300줄씩 말아봤어? 하다 보면 팔에 감각도 없어져. 

 

수모도 많이 겪었지. 

원래 살던 집의 월세를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서 방 한 칸짜리 작은 집으로 옮겼는데, 거기 집주인이 상당히 괴팍했어. 


주중에는 밤낮없이 일하느라 빨래할 시간도 없었거든, 일요일에 겨우 빨래 돌려서 밖에 좀 널어놓았다고* 그걸 걷어다 집 문 앞에 내팽개치고 가곤 했어.

* 독일에선 루허자이트(Ruhezeit, 휴식시간)라는 불문율이 있어 낮 1~3시 사이와 일요일에 청소, 빨래 등 소음이 발생되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남들이 볼 수 있는 야외에 빨래를 널어놓아도 안된다.


가욋돈 좀 벌어보겠다고 김치도 종종 만들어 팔았어. 농장에서 야채를 떼와 밤새 씻고 헹구고 하는데 물 많이 쓴다고 또 욕하고... 집 앞 복도에서 나랑 마주칠 때마다 나지막이 '슈바이네, 슈바이네' 하더라니까.

*슈바인(Schwein)은 돼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개 XX와 같은 쌍욕. 함부로 말했다간 벌금형에까지 처해진다.


사기당한 적도 많아. 


사기 친 사람들? 다 한국사람들이야. 

다 같이 못 사는 처지에도 시기 질투가 만연했어. 조금만 잘되는 것 같으면 끌어내리고 험담하고. 어떻게든 벗겨먹으려고 하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었어. 처음에 나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도 (필자가) 이상한 사람 아닌지 걱정했다니까?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왜 안 했겠어. 


남편 돌아가시고 난 3년 동안이 정말 고비였어. 


그런데 그땐 이미 아이들이 여기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고, 돌아간다 한들 발 뻗고 편안히 있을 데도 없었어. 


진술 안 해줬던 남편 회사 동료 있지? 동향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남편 죽음으로 보험금을 많이 타서 부자가 됐다고 고향에다 소문을 내고 다녔다지 뭐야. 


우리 남편이 보낸 돈으로 샀던 땅들은 시동생들이 다 팔아버렸어.


재혼 생각?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들은 몇 명 있었어. 다 성에 안차더라고. 

아이들 키우는 게 우선이었어. 그리고 한번 해봤는데 뭐가 좋다고 또 하겠어? 



남편 따라갈 생각도 했었어.


그런데 남편의 죽음이 오해받는 바람에, 그 고생한 걸 생각하니 어떤 식으로도 그것과 연관되는 건 죽어도 싫더라고.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냥 살았어. 애들 때문이라도 억지로 버텼지.


남편이 가실 당시에 큰 딸과 큰 아들은 고등학생이었고, 늦둥이 막내는 겨우 6살밖에 안됐었어. 그 어린애들이 속 한번 안 썩혔어.

 

사랑도 제게서 나고 미움도 제게서 난다고 하잖아. 우리 애들은 사랑만 나는 아이들이었어. 

아빠 닮아서 정이 많고, 똑똑해서 공부도 잘했어. 지금은 다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 효자효녀지.


미운 사람도 많았지만, 또 좋은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어. 많은 도움 덕분에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살아있어. 


신은 견딜 만한 시련만 주신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8. 

2000년대 중반 들어서 빚도 다 갚았고, 요즘은 '만고 땡'이야. 팔자 좋아.


혼자 살던 집은 처분하고, 오 년 전부터 여기서 큰 딸네와 같이 살고 있어. 

교회에서 합창단도 하고, 친구네 놀러도 가고, 문화센터도 다니면서 지내. 


손자 둘은 다 커서 이제 손도 별로 안가. 사위 눈치가 조금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위가 우리 딸 말이라면 또 껌뻑 죽어.


이제 뭐 바라는 것도 없어. 애들 건강하게 잘 되는 것뿐이지 뭐. 

약초 공부를 해보고 싶긴 해. 우리 아버지 하던 것처럼. 


언젠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에 시민권은 안 받았어. 뭐 영주권만 있어도 여기서 혜택 받을 건 다 받을 수 있어.



9.

다시 태어난다면? 


난 다시 우리 남편 만날 거야. 그리고 하늘처럼 섬길 거야. 

 

그렇게 억울하게 가신 게 너무 마음 아파. 그땐 고생 안 하게 내가 뭐든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지.


요즘에 부쩍 남편을 찾아다니는 꿈을 자주 꾼다? 


“왜 안 와~"하고 소리치면서 월남 파병 나간 남편을 찾아다니는데, 

찾는 남편은 안 나오고 자꾸 웬 여자가 내 앞을 막아서. 찾지 말라고, 이제 자기 남편이라고. 

애까지 딸렸더라고. 새 살림 차렸나 봐.


아마도 꿈에서 남편을 찾는 날이 내가 하늘로 돌아가는 날이 아닐까 해. 그리운 남편 만나러...





긴 시간 동안 담담하게 살아온 이야기 들려주신 김말자 여사님(가명)께 다시 한번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커버사진 출처 :  Exhibition celebrates Germany's Korean community / dw.com



<참고 글>

독일 유네스코 ‘산업’유산을 찾아서-탄광과 제철소 문화와 예술이 되다 / 여행신문

[한국 외교사 명장면]<6>독일로 간 광부-간호사/동아일보

한국 광부·간호사 파독 약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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