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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Mar 30. 2020

나는 자연인이다

숲의 나라 독일

독일은 남쪽의 알프스 산맥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국토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산은 드물지만 숲과 나무는 많다. 전 국토의 33%가 숲으로, 총면적이 약 1.14천만 헥타르에 달한다(우리나라 전체 면적인 1천만 헥타르 보다도 조금 더 크다). 숲에 있는 나무를 모두 합치면 약 900억 그루나 된다고 한다. 


독일의 자연공원(Nature Park) 분포도@Wikipedia




숲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동화 '헨젤과 그레텔(Hänsel und Gretel)'의 배경은 독일에서 가장 넓은 숲인 '검은 숲(Schwarzwald, 슈바르츠발트)다. 나무들이 검어서가 아니라, 대낮에도 빛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나무들이 들어서 있어 항상 어둡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두 남매는 그 험한 숲을 며칠 밤낮으로 헤매고 다니다가 과자집도 만나고, 마녀 할머니도 만나 죽을 고생을 한다. 불쌍한 아이들...(등신 머저리 아빠ㅅㄲ)



삽화 by Alexander Zick @ Wikipedia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로마제국이 게르마니아(Germania), 즉 독일을 손에 넣지 못한 이유도 숲 때문이다.


서기 9년, 세계 최강의 로마 군대는 게르만 땅을 차지하고자 야심 차게 북진을 꾀한다. 

하지만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  Schlacht im Teutoburger Wald)'에서 대패한 후 다시는 게르마니아 땅을 넘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패인은 익숙지 못한 지형 때문이었다. 로마군은 평야에서의 싸움에서는 백전백승을 자랑했을지 몰라도, 좁고, 어둡고, 장애물이 많은 원시림 안에서의 싸움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전투 당일날에는 폭우까지 쏟아졌다고 하니 로마군들이 얼마나 우왕좌왕 당황했을지 눈에 선하다. 2만 명에 달하던 로마군 병력은 그렇게 전멸하고 만다.


BATTLE OF TEUTOBURG FOREST @ GRANGER.com


 



우리나라도 국토의 대부분을 산림이 차지하고 있지만 실생활에서 울창한 숲을 접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어르신들 모시고 등산 갈 때나 날 잡아 휴가 내서 휴양림 갈 때 정도?) 

그러나 독일은 실 생활공간과 나무가 적절히 어우러져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산림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우리 가족은 작은 정원이 딸린 아파트 1층(여기 식대로는 0층, 땅층이라고도 함)에 살고 있다. 


정원에는 아파트 높이 만한 거대한 전나무(정확한 나무 이름은 모르겠지만 사시사철 파랗다) 한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못해도 100년은 더 됐을 것 같은 묵직하고 튼튼한 이 나무 덕분에 마치 숲 속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집에 놀러 온 손님들도 '바로 집 뒤에 숲이 있나 봐요~' 라면서 깜빡 속을 정도다.(나무 뒤편엔 바로 다른 아파트가 서있을 뿐이다.) 여름에는 차양막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해 선풍기 한번 돌리지 않고 한여름을 날 수 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본 옆집 정원. 노부부가 365일 공들여 가꾼다.


우리 집 정원에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은 새와 다람쥐다. 부화한 새 알 껍데기도 두어 번 정도 목격했다, 한 번도 실제로는 본 적 없지만 매일 아침 땅이 파헤쳐져 있는 걸 보면 두더지가 사는 것도 틀림없다. 길고양이도 가끔 지나다니는데, 한번은 새와 고양이가 살벌하게 다투는 장면도 목격했다.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더라. 창문에 머리를 박았는지 창틀에 쓰러져 있던 새도 있었다. 정원 한편에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집 앞 주차장 위에서는 여우도 봤다. 개가 목줄도 안 하고 돌아다닐 일은 만무하고, 고양이치고는 너무 커서 뭐지? 싶었는데 여우였다(식구들이 뻥 아니냐고 못 미더워하는데 진짜다!)


고속도로의 양 옆으로도 숲이 무성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로드킬도 종종 발생한다. 


새와 다람쥐 등 작은 동물들의 사체는 심심하면 한 번씩 목격되고, 지금까지 멧돼지 한 마리, 여우 두 마리(크기로 보아 어미와 새끼인 듯)도 길 한가운데 누워있는 걸 봤다. 통행에 지장을 주는 큰 동물들은 비교적 빨리 치워지는(?) 편이지만, 작은 동물 사체는 저절로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그냥 그 자리에 하루고 일주일이고 계속 놓여져있다.




독일에 온 이후 전업주부로 역할이 바뀌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 청소, 빨래 등 살림 실력이 쑥쑥 늘고 있다.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먹거리들을 채취하는 것이다.


봄이면 명이,

여름이면 산딸기,

가을이면 밤, 

겨울이면 굴*

... 쉴 틈이 없다. 


*겨울엔 응당 굴(석화)을 캐러 네덜란드로 원정을 갔었어야 했다. 굴 서식지 좌표는 독일 맘 카페에서 공공연하게 공유되며, 물때를 알려주는 앱까지 있다. 그러나 먼 거리(편도 4시간)와 어린 둘째 핑계로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아 천추의 한이로다. 


채취의 백미는 명이다. 한창 재미 붙였을 때는 눈만 감으면 한눈 가득 명이 밭이 펼쳐진 모습이 떠오르더라.  

"오오 주인 없는 저 명이들 다 내 건데. 얼른 가서 더 따와야 하는데..."


명이는 독일어로 Bärlauch(배어라우흐)라고 한다. '곰이 먹는 파'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Wild Garlic(산마늘)이다. 여리여리한 잎에 알싸한 마늘향이 돋보이는 이 나물을 독일에서는 샐러드에 곁들여 먹는 재료로 많이 이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고기에 곁들여 먹는 간장 장아찌 재료로 잘 알려져 있다.  


기본인 간장 장아찌부터, 고춧가루와 액젓을 넣어 만든 명이 김치, 부추 대신 명이를 듬뿍 넣은 명이 부침개, 생으로 먹는 명이 쌈과 샐러드, 명이와 올리브유를 함께 넣고 간 명이 페스토까지.. 동 서양식을 막론하고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다. 밭에 한번 다녀오면 일주일간은 밥상에 각종 명이 요리가 올라온다. 장아찌로 변신한 명이는 겨울까지도 먹을 수 있다.


먹어는 봤나 명이 부침개



일반적으로 명이 채취는 불법*은 아니나 몇 가지 가이드라인이 있다. 


뿌리를 캐지 말고 줄기만 잘라 갈 것, 길가에 있는 것은 손대지 말 것, 그리고 한 다발 정도의 '적당한' 양 만을 따갈 것. 상업적 용도로 대량을 거둬가는 경우 벌금이 부과된다. 

*고사리도 숲에서 자주 발견되는 산나물 중 하나이지만, 이의 채취는 불법이다. 또한 카네이션, 튤립, 수선화, 수련, 이끼 등도 채취가 금지된 식물들이다.


명이는 바로 지금, 3월 말~4월 초가 채집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다. 너무 빨리 가면 잎이 잘고, 너무 늦게 가면 꽃이 피기 시작해 맛이 써지고 질겨지기 시작한다.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하는데 이 놈의 역병 때문에 나갈 수가 없는 게 문제다. 


'명이를 따러 외출할 경우 벌금형에 처함'이라는 규정은 없으나 외출 자제를 권유하는 마당에 굳이 나돌아 다니는 민폐를 행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명이가 뭐라고.. (아, 내 명이 ㅠㅠ)





딸은 나이가 들수록 엄마를 닮는다고 했던가? 


우리 엄마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큼직하니 순박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요즘 말로 '차도녀'가 따로 없다. 그러나 외모에서 풍겨지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리 장여사는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자연인으로 변신하곤 한다.


따뜻한 봄이 오면 엄마는 비닐봉다리 한 장과 과도 하나를 들고 덜렁덜렁 길을 나서서 동네 여기저기를 헤쳐가며 들풀을 캐온다. 가끔 서울 근교나 시골로 놀러 갈 일이 생기면 물 만난 고기와도 같다. 함께 산책을 하다가도 눈 깜짝할 새에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조금 후 이름도 모를 풀 다발을 들고 재 등장한다.


(엄마피셜, 한결같이 소화기능에 좋고 머리가 맑아지는 풀들인) 민들레, 쑥, 쑥갓, 냉이, 기타 등등을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생으로 쌈도 싸 먹고, 무쳐도 먹고, 쌀과 함께 빻아서 떡도 해 먹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냥 시장에서 사 먹으면 되지 뭐하러 저러시나 싶어 마냥 못마땅하기만 했었는데... 


작년 이맘때쯤 혼자 명이를 따고 있는 내 모습이 영락없이 엄마를 닮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살림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이런 자연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늘따라 엄마가 해주는 쑥개떡이 너무 먹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코로나 미워잉 ㅠㅠ. 




* 커버 사진 : Baerlauch-Teppich.Hainich.jpg / Wikipedia Commons


<참고 글>

Forest cultural heritage in Germany / deutschland.de

Was darf ich im Wald pflücken? / jumpradio.de

숲이 많은 평야의 나라 '독일' / 하니리포터

세계사 획을 그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오피니언 뉴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Teutoburg_Forest / Wikipedia

Bärlauch: Sammeltipps 

Wann das Pflücken von Pflanzen verboten ist / t-onlin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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