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말이야. 그 사람이 잘못했네"
혜자는 영희에게 종종 같은 말을 반복한다. 살면서 몇 번쯤 들은 말인데 또 듣는 좋지 못한 말. 그럴 때 그냥 들어주면 될 것을 영희는 혜자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전에 말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해주지 마라니까."라며 맞받아친다.
전화를 끊으면 비슷한 상황을 대처하던 막내삼촌이 생각난다. 삼촌은 할머니가 수십 번 같은 말을 해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이 맞장구를 쳐주고, 할머니가 이웃사촌 아무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래 말이야. 그 사람이 잘못했네!!"라고 말했다. 뭐,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든지 삼촌은 번지르르 웃는 얼굴로 인간 자판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저 정도면 사람을 놀리는 게 아닌가 싶지만, 할머니는 막내삼촌을 상대로 몇 시간을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막내삼촌이 유일하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였나 싶다.
혜자에게 따박따박 내 안에 할 말을 하고 불편하게 전화를 끊을 때면 그 장면이 생각나서 찜찜하기를 반복하다 다음번에는 영희도 한번 써먹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때 첫 시도를 연습하며 알았다. 그걸 써먹을 정도가 되려면, 나에게 감정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걸. 나에게 여유가 없을 때는 상대의 어떤 말들도 받아낼 여유가 없다는 걸.
영희는 내면에 여유의 공간을 충분히 만들어 둔 순간부터 혜자와의 관계가 편해졌다. 혜자가 무슨 말을 해도 막내삼촌처럼 해보았더니, 눈치 빠른 혜자는 "문디가시나, 내 놀리나. 이제 안 할란다..ㅎㅎ" 하더니 머쓱해하며 스스로 대화의 화제를 돌리는 혜자를 본다.
여유가 생기니 이런 방법도 있다. 영희는 밥을 먹다가 열변을 토하는 혜자의 이야기에 조용히 스피커 음량을 줄인다. 말이 끝난 것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1분 후쯤 멈춘 소리.
밥은 먹었나?
응 먹고 있다
그래 밥 챙겨 먹고 해래이.
인생고수에게 배운 대화의 기술
누구도 기분 나쁘지 않고 찜찜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다 들어주었다. 영희는 혜자에게 짠한 마음이, 혜자는 영희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대화의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