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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경 Dec 10. 2023

아이가 아픈 날

부부의 파트너십

[231209 토요일]

 8일 자 매거진의 《콜리플라워 당근 팽이버섯 루꼴라 솥밥 이어, 아무 일 없는 일상에서 노래 한곡 듣고 펑펑 울어버린 새벽 남편의 위로를 기록하려 했다. 타이틀은 원래 《엉엉 울어버린 12/8일 새벽 이야기》였다.


 오늘이 9일인데 8일 내가 엉엉 울었다니 먼 옛일 같다. 남편의 토닥임과 한두 마디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사실은 기억나지만 정확히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조차 희미하다. 24시간 전이 까마득한 이유.


[08:00]

 오늘 딸 소람이가 많이 아팠다. 26개월이 되도록 24시간 이상 고열을 동반하거나 구토를 하며 아팠던 건 코로나, 돌치레 딱 두 번이었다. 가벼운 코감기, 기침은 앓더라도 약 없이 자가면역으로 가벼이 지나갔었다.

12/9 아침 남편 밥 (무, 버섯, 양배추, 계란, 딜)

 8일 아침 그렁그렁한 가래소리가 잠깐 들리다 종일 기침도 없고 열도 안 나고 가래도 괜찮았다. 그냥 그렇게 지나가나 보다 했는데 오늘 아침 아이가 가래 끓는 소리로 깨더니 "엄마 림이 많이 아파서 병원 가야겠다. 병원 가자."라고 말했다.(림이는 딸아이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애칭이다.)


 오늘도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다. 토요일은 남편이 2시까지 진료를 하고 집에 3시쯤 도착한다. 남편은 오늘 하고 싶은 거 있냐고 묻는다. 소람이 어젯밤 12시까지 아빠랑 레고 놀았다. 남편도 피곤할 테니 오늘은 집에 오면 좀 쉬라고 했다.


[09:40]

 집 앞 소아과 똑딱을 예약하려니 10시부터 오픈된단다. 9시 40분쯤 미리 나서본다. 병원에는 나보다 먼저 온 대기 환자들이 이미 20명이다. 곧 오전진료가 마감되었다.

요즘 부쩍 애착인형, 애착 장난감들을 들고 다닌다.

 소아과 원장님은 다행히 요즘 어린이집을 강타하는 중국폐렴은 아니고 가래기침과 콧물이 동반되니 가습기를 필히 켜고 항생제 없이 약을 먹여보자고 하셨다.


 오늘 꼭 기억하고 싶은 것은 소람이가 처음으로 아파서 병원을 가야겠다고 말한 날이며, 진료실에 들어가서도 울지 않고 원장님께 아프다고 말한 날이다. 벌써 이렇게 커버렸나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 일찍 크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소람이가 약국을 갔다가 뽀로로 대 젤리를 집었다. 아프다고 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병원에서 울지 않은 첫날이라 뽀로로 설탕 덩어리를 3500원이나 주고 사줬다.


 빵이 먹고 싶다고 한다. 나는 안다. 소람이는 지금 소세지가 먹고 싶다. 집에서 건강식으로 최대한 먹이려 노력하지만 소람이는 소세지 빵의 소세지, 찜질방 푸드코트에서 맛본 너비아니를 엄청 좋아한다.


[12:00]

 아프니까 오늘은 허락한다. 역시 빵은 안 먹고 소세지만 빼먹는다. 밥은 안 먹는다. 우유라도 먹으라고 줬더니 잘 마신다. 먹고 싶은 거라도 실컷 먹으라고 평소 좋아하는 대추, 견과류, 크랜베리, 블루베리도 준다. 잘 먹는다. 잘 먹으니 빨리 나을 것 같다. 밖에서 놀지도 못하니 보고 싶은 영상도 허락해 준다. 편하게 보라고 등쿠션도 가져다준다.

[13:00]

 기침이 계속된다. 약을 건네본다. 약 안 먹겠다고 난리다. 강제로 먹였다가 모조리 토한 전적이 있어서 조금 더 기다려본다.


[14:30]

 스스로도 아픈지 약을 한입 넣었다. 그러곤  시간 동안 먹은 모든 것들을 쏟아냈다. 오늘 첫 번째 구토다. 애착이불, 쿠션, 방석, 소람이 옷, 내 옷과 속옷 모두 다 구토로 흥건히 젖어버렸다. 너무 놀래서 괜찮아 괜찮아 토닥여줬는데 처음엔 소람이에게 하는 말 같다가 나에게 하는 말로 들려왔다. 구토 묻은 빨랫감은 애벌빨래 후 세탁기로 돌렸다. 시점에 한쪽 귀에 꽂고 있던 에어팟에서 <Don't Stop Me Now-퀸>이 흘러나왔다.

[15:00]

 아이를 씻겼다. 가래 낀 감기가 처음이라 기침소리도 안 좋고, 신경 쓰여서 안 씻기고 싶었는데 온몸 모조리 구토로 젖어버려서 안 씻길 수가 없었다. 씻고 나온 아이가 갑자기 바르르 떤다. 수건과 이불을 둘둘 둘러 꼭 껴안아 준다. 구토로 어질러진 주방을 치워본다. 아이는 "졸려. 텐트방에서 잘 거야." 하더니 5분 채 되지 않아 잠들어 버렸다. 귓가에는 <You Are Not Alone-마이클 잭슨>이 들린다.


[15:20]

 설거지를 한다. 제일 하기 싫은 빨대컵 설거지는 그릇, 냄비, 컵을 씻고 난 다음 제일 마지막 순서다.

토요일 퇴근길 남편은 "수제버거 사갈까?"라고 전화하고 나는 "좋지." 대답한다. 남편이 왔다. 소람이는 아직 자고 깨지 않게 조용히 오전 일과를 나누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16:00]

 아이가 생각보다 길게 잔다. 걱정도 되고, 아이가 잘 때 나도 좀 쉴까, 아니면 글을 써볼까, 음악 들으며 책을 읽어볼까 생각하다가 낮에 소세지 먹고 토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왠지 저녁에도 밥은 무리일 것 같아 사골을 육수로 단백질 폭탄인 사골 황태국을 끓여본다.

[17:30]

 아이가 깼다. 텐트방에서 자던 아이는 안방에서 쉬는 아빠 으로 가서 이불과 베개에 토했다. 열을 재보니 38.8이다. 열날 때는 옷을 가볍게 입힌다. 반팔을 입히고 바지는 벗겼다. 방수패드 덕분에 침대 매트리스는 괜찮다. 아이가 또 토하니 황태국이라도 먹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애벌빨래 후 이불빨래를 한다.


[18:30]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아빠가 책을 읽어준다. 평소라면 조잘조잘 말 많은 딸내미가 조용하다. 그래도 남편이 잘 케어 중인 것 같으니 나는 과탄산소다, 베이킹소다로 화장실 청소를 한다. 청소하는 김에 샤워도 한다. 개운하다.


[19:00]

 남편이 조금은 겸연쩍게 "마라탕 먹을까?" 물어본다. 김치냉장고에는 밥이 있고, 황태국을 끓여뒀지만 나는 "좋지."대답한다. 황태국은 내일 먹어도 맛있기도 하고, 육아가 매운맛이니 나도 오늘 매운 게 땡긴다. 전혀 1g도 서운함이 없다.

[20:30]

 남편과 매운 마라탕과 달콤 바삭한 꿔바로우를 먹었다. 소람이는 거실에 누워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평소였으면 달려와서 "나도 림이도 먹어싶어"를 외칠 아이인데 조용하다. 미안하다. "소람아, 두부 먹을래? 두부랑 국물 먹어볼까?" 물어보니 터벅터벅 걸어온다. "림이 국물 먹을래."

반가운 마음에 얼른 황태국을 떠 온다. 토할까 봐 천천히 천천히 먹어하면서 두부도 반씩 잘라 입에 넣어준다. 10분쯤 지났을까? 세 번째 구토를 했다. 소람이 옷과 내 옷, 속옷까지 젖어버렸다. 애벌빨래만 하고 말려뒀다. 왠지 또 빨랫감이 생길 것 같으니 세탁기는 내일 돌려야겠다.

[21:00]

 남편이 축 쳐진 소람이를 돌보고 있다. 나는 재활용을 하고 왔다. 12월인데 반팔차림으로 나가도 시원하다. 이상기온이 심각하다. 소람이가 배도라지가 먹고 싶다고 한다. 가래기침에 배도라지가 좋으니 효과가 있길 바라며 먹여본다. 네 번째 구토를 했다. 애벌빨래 후 말려둔다.

[21:59]

 우유를 먹고 싶단다. 고민이 된다. 왠지 먹으면 또 토할 것 같다. 물을 줘보니 우유를 달란다. 토할 것 같지만 그래도 달라니 줘본다. 어라, 안 토한다. 갑자기 물이랑 우유랑 같이 빨아먹는다. 그러더니 장난을 치고 웃어준다. 아, 하나님 부처님 관세음보살 아멘. 이제 진짜 괜찮아지는 것 같다. 열은 37.5도다.

[22:10]

 실컷 웃다가 아이가 아빠랑 잘 테니 나보고 나가란다. 오늘은 서운하지 않다. 드디어 나으려나 싶다. 주방 식탁에 앉아 책을 읽어볼까 글을 써볼까 설렌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남편과 림이가 나온다. 잘 생각이 없다. 요구르트를 먹더니 레고를 하잔다.

[231210 / 00:00]

 소람이는 기력을 회복하고 자정이 넘어 잠들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 글을 쓰는 내 옆에서 간간히 가래기침을 한다. 열은 떨어졌다. 제발 내일 아침에도 밝은 소람이의 웃는 모습으로 시작하길. 내일은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가 아플 때 부부는 많이 싸운다. 우리 부부 역시 그랬다. 둘 사이에 툭 터놓고 말하긴 껄끄러운 서로의 불만들이 아이의 아픔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이 드니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 부부 역시 코로나 때, 돌치레 때 서로에게 감정이 상했다. 아픈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부딪히는 남편과 한 공간에 있는 게 더 힘들었다.


 꽤 긴 하루였지만 오늘을 마무리하는 우리 가족은 셋다 수고했어를 외쳤다. 림이도 내가 알려준 대로 말했다.

"아빠, 수고했어. 잘 자"


 남편도 꽤 힘든 날이었을 텐데 표정이 뿌듯해 보인다.

부부의 파트너십, 딸의 회복력에 감탄한다.


"림아, 내일은 싹 낫자. 파이팅!" 나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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