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책 표지는 어떻게 쓰면 좋을까?
일력은 매일 주어지는 오늘을 뜯어야만 시작되고, 또 한 번 뜯어야 내일이 찾아옵니다. 일력이 없어도 하루는 지나고, 오늘 완료하지 못한 일들과 함께 오늘을 닮은 내일이 시작되지만, 일력을 사용하면서는 적어도 오늘과 내일을 내 손으로 끝내고 시작하게 됩니다.
- 달력 <오늘이 좋아지는 일력 사용법> 중에서
올해도 일력을 선물받았다. 새 달력을 꺼내어 첫 장을 찢기 전 설렘과 망설임이 좋다. 표지를 찢기 전 새해의 다짐이나 계획을 미리 정리해야 할 것만 같다. 그렇다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리란 건 잘 알고 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해를 넘어가 버리는 시간과 달리 일력은 내 손으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시작한다는 마법같은 자기효능감. 혹은 통제력.
2020년은 무엇 하나 통제하기 어려운 한 해였다.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손쓸 새 없이 퍼져버린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마음이 힘든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되려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과 엄습하는 불안 때문에 무엇이 내게 중요한지 가려 보게 되었다. 더 솔직해지고 단단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미래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중요하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마지노선을 그려보자. 내가 어떤 청사진을 그리든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가겠지만 책 표지와 목차 정도만 써두는 셈 치자. 어차피 글은 쓰는 게 아니라 고치는 거니까. 일력의 첫 장을 뜯기 전, 연말정산.
처음으로 필라테스 수업을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세 달 가고 그만둬야 했지만 유익한 시간이었다. 몸을 네모난 상자처럼 만들 때가 기분이 가장 좋았다. 코어의 힘으로 내 몸을 온전하게 통제하는 느낌이 들었다. 벤치 프레스를 할 때 견갑골을 스스로 고정시킬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몸이 단단해지면 마음도 더 잘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필라테스 수업이 시작되면 좋겠다.
여름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마음 근육이 고장나기 전에 가야겠다 싶었다. 상담을 하고 나니 건강검진을 받은 기분이었는데, 현재의 마음은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에게 벌어진 문제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훈련이 잘 되어있다고 했다. 어차피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인데. 내 손 밖의 일에 마음쓰지 않는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상을 올해 초에 잠깐 하다 그만두었는데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곳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빌려준 고마운 사람. 솔직함에 위로를 받았고 유쾌함에 힘을 얻었다. 받은 만큼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 또 다짐. 몸과 마음의 회복탄력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한 해였다.
영화관에 자주 가지 못했다.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TV 시리즈를 많이 보게 되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멜로가 체질>도 낄낄대며 봤지만 HBO에서 만든 <빅 리틀 라이즈>가 최고의 걸작이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편집.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입체적인 여성 주인공들. 엄마라는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없는 여성 캐릭터들 간의 연대.
이 멋진 드라마를 시작으로 <이어스 앤 이어스>나 <퀸즈 갬빗> 같은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새롭게 각색된 <보건교사 안은영>를 보며 납작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영화 중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남매의 여름밤>이 좋았다. 한 편은 '서로를 바라본다'는 사랑의 한 테마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다른 한 편은 가족, 특히 재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여운이 길게 남았다.
좋았던 작품 대부분이 여성의 이야기였는데, 여성 서사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순간이 있다. 제11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 작품인 강화길의 <음복>은 충격이었다. 남자라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남자라서 모르는 것이 왜 잘못인지 절절히 깨달았다. 김초엽, 장류진, 정세랑의 작품을 읽으며 올해 정말 많이 배웠다. <음복>의 엎질러진 차례상으로 시작해서 하와이에 근사하게 차려진 김시선의 제사상*으로 올해의 문학 여행을 마쳤다.
*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의 내용 일부
올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이경준의 <블러, 오아시스>였다. 선물하려고 산 책인데 단숨에 끝내버렸다. 좋은 음악 친구를 둔 덕분에 올해 다양한 장르를 청음할 수 있었다. 작년에 갔던 음감회도 좋았는데 우리 직접 음감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브릿팝 대서사시를 맛깔나게 써내려간 이 책이 불씨에 불을 지폈다. 올해 소설을 많이 읽었다면 새해에는 음악의 세계를 파헤쳐보고 싶다.
성장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 해다. 좋은 프로덕트 매니저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걸까? (그런 게 존재는 하는 걸까!) 책도 많이 읽고 마티 케이건 선생님도 만나고. 기획자들과 함께한 그로스 스터디도 도움이 됐다. 핵심은 제품의 효과를 측정하고 학습을 바탕으로 개선하는데 있다. 측정과 학습. 피드백의 순환에 대한 고민 끝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새 회사에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측정과 학습에 포커스를 두고 일해보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싸고 빠르게 실험을 할 수 있을까? 시장과 고객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일까? 학습의 결과를 다음 개선에 잘 반영하려면 어떻게 일해야 할까? 올해 책과 인터넷 강의로 많이 공부했으니 이제 실전이라는 생각으로 덤벼봐야겠다.
다른 한 편으로 직장인이 아닌 삶에 대한 고민도 싹텄다. 퇴사하면서 여러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들 회사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공교롭게 올해 처음 읽은 책이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였는데 직장이라는 개념이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올해 모베러웍스와 두낫띵클럽*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사 다니고 선형적(linear)인 커리어를 쌓는 건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일까? 내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소셜 딜레마>를 보면서 가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회사 타이틀이나 SNS가 주는 가짜 효능감을 떨쳐내야 한다. (블라인드에 자꾸 올라오는 네카라쿠배* 논쟁... 그놈의 줄세우기 그만 좀 합시다...) 황현산 선생님의 조언이 아마도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민 순으로 IT 기업 순위를 줄세우기 하는... 주석 달기도 싫다...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불투명한 것들이 투명한 것의 힘을 만든다.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저 불투명한 것들과 그것들의 근거지인 은밀한 시간에 달려있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