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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Aug 18. 2022

오래도록 헌신하는 마음

멀리 가기 위한 이정표 다시 세우기

일자리는 생계 수단이지만 일은 인생이 그 사람 앞에 놓여 있는 의무를 다하는 특정한 존재 방식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일이란 모름지기 평생에 걸쳐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길어야 하며, 많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넓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일은 높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어떤 이상에 복무하게 만들고 올바름을 갈망하는 영혼을 충족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ㅡ 데이비드 브룩스, <두 번째 산> 중에서


발리에 가기로 했을 때는 이미 마음이 지친 터였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매일 가슴을 옥죄어 왔다. 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는가. 셰릴 샌드버그는 커리어가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헛발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애초에 이 정글짐을 왜 오르려 하는가. 공허함이 물밀듯이 밀려오기도 했다. 언제 스러질지 모를 모래탑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마음이었다. 큰 파도 한 번이면 무너질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했다. 돌파구가 보이지는 않지만 구명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휴가를 떠났다.


많은 휴양지 중 발리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요기(Yogi)와 서퍼(Surfer)들 때문이었다. 매일 같은 수련을 반복하는 사람들. 결국 파도에 넘어질 것을 알지만 다시 보드 위에 오르는 사람들. 깨달음의 순간 혹은 내가 탈 수 있는 파도를 오래도록 기다리며 바라는 이들에게서 에너지를 얻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어언 5년 차.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자가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신입 기획자 시절 김봉진 대표님이 하셨던 질문을 떠올렸다. 5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대표님은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길을 잃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고 하셨다. 당시에 나는 인정받는 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회사에서도 업계에서도 인정받는 PM. 멋진 링크드인 프로필을 보고 좋은 회사에서 러브콜을 보내오길 바랬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때 원하던 모습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유효한 이정표는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발리에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을 들고 간 이유도 더 나은 내비게이션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청년기에는 누구나 개인의 성공, 즉 물질이나 명예의 획득을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며 이 과정을 삶의 첫 번째 산을 오르는 시기라고 정의했다. 첫 번째 산에 오르는 과정도 쉽지는 않지만 중요한 순간은 우연한 계기로 절망의 골짜기에 빠지는 때라고 했다. 개인의 성취가 주는 자아도취적인 행복만으로는 인생에 불쑥 찾아든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헌신이 주는 기쁨만이 오래 남으며 스스로를 내려놓을 때만 이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일과 결혼, 종교(철학)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이것이 두 번째 산이다.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여전히 첫 번째 산을 잘 올라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발리에 가서 책을 다시 읽으니 개인의 성공이 헌신을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번째 산을 오를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이 개인의 성취가 주는 행복보다 크고 깊으며 영속적이라는 것이다. 책으로 읽을 땐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발리인들과 요가 수행자들의 삶을 직접 보고 체험하며 잠깐이나마 더 큰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


발리에 가면 매일 아침 공양을 올리는 발리 사람들(Balinese)을 볼 수 있다. 야자나 바나나 잎으로 만든 작은 짜낭 사리에 정성스럽게 밥이나 꽃, 음식을 올려 거리며 집, 일터에 두고 기도를 올린다. 처음에는 명절이나 기념일인 줄 알았는데 이 정성스러운 의식은 매일 반복된다. 애니미즘이 혼재된 발리 힌두교에서 내세의 환생은 중요한 믿음 중 하나다. 거리의 새와 동물로 다시 태어난 조상들께 공양을 올려 업보를 잘 쌓으면 더 나은 내세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헛된 믿음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지극 정성을 직접 보면 이 꾸준한 헌신은 발리인들의 일상에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공양을 매일 반복하면 나와 내 가족의 다음 생을 바꿀 수 있다니. 적어도 이들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 사회>가 이곳엔 없다.


요가 수행자들의 삶에서도 비슷한 믿음 체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타 요가 수행자들이 모이는 짱구의 <더 프랙티스>에 매일 요가를 하러 갔다. 건강한 몸과 마음의 정수를 얻기 위한 고된 수행. 깨달음에 도달하기엔 설명을 들어도 난해했고 몸으로 이를 체험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사흘째 수업을 듣고 나니 구루들이 말하는 평온함의 경지에 도달해보고 싶다는 마음 정도가 생겼다. 어떤 기분일까? 온전히 평온한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 걸까?


셋째 날 명상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본인의 첫 수행 경험담을 말해주었다.


"처음 수행하러 더 프랙티스에 왔을 때 저는 이곳이 참 싫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수련하는 것도 다 힘들고. 더 나쁜 건 이 복잡하고 어려운 걸 매주 똑같이 반복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반복이 중요합니다. 매주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해와 숙련도가 점점 깊어져요. 반복 없이는 불가능한 과정입니다. 힘들지만 그 끝에는 평온함이 주는 만족감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한 방향으로 깊어지는 것이 중요해요


깊어지는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커리어의 성공이나 개인의 성장이 아니라 그 끝에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예컨대 성공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PM이 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멀리 내다보았을 때 - 나는 동료들이 성공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서포터가 되고 싶은가?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공동체에 헌신하고 싶은가? 아니면 작게나마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드는 제품을 만들어 기여하고 싶은가? 10년 뒤, 20년 뒤 어느 방향으로 깊어지고 싶은가 고민해야 한다.


지금 당장 빛나는 성취를 만들어내지 못해도, 길을 헤매거나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더라도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았을 때 북극성과도 같은 이정표가 하나 있다면 결국은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조금 생겼다. 힘들 때 종종 링글 이승훈 대표님의 글을 꺼내어 보는데 다시 읽어보니 결국 같은 말의 다른 판본이다.


5~6년 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 장벽이라는 것이 정말 제 인생의 발목을 잡는 문제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였고, 기술 - 사람 - 콘텐츠를 잘 연결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보고 들어갔다기보다는 진짜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창업 초기의 더딘 성장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승훈 대표님의 글 (원문) : https://brunch.co.kr/@seunghoon8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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