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는데, 그놈의 반 토막만 몇 개째인지. 반 더하기 반은 일 더하기 일처럼 찰싹 붙지 못하는 것이 아마 자연수조차 되지 못한 일개 조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을 때는 그래도 일 같은 영점 몇이 되어 졸업을 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다시 소수로 돌아와 무한한 반 토막을 생성하고 있다. 차라리 내 앞에 촤라락 마감들이 정해져 있고, 그 마감들을 마무리 하는 정도에 따라 학점이 나오고 그걸로 모든 생활이 가능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으면서도 성격이 무난하지는 못해 혼자서 어떻게든 끌어가 보려고 하다가 일시정지 해 두기를 무한 반복, 이것이 시지프스의 마음인가 한다.
시작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보니 왜 반 토막들만 그리 많았는지에 대한 얄팍한 성찰이 오기는 한다. 어떤 일이든 질러놓고 수습하다 보면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었던 경우가 많아 그것이 습관이 되었던 탓이다. 대부분 그런 일들은 일정한 틀이 있어서 시작하고 버티다 보면 끝이 나는 방법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시작’이라는 단어 앞에 ‘글의’ 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다. 아마 두 단어의 가장 앞에 괄호를 치고 언제 끝날지 모를,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도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좀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글은 굴려 올리고 올려도 어떤 꼭대기에 올라 뿌듯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굴려야 할 또 다른 언덕 앞에 서게 할 뿐이다. 시지프스가 하나의 언덕에서 무한히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돌을 꼭대기에 안착시켜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을 받은 것은 이미 그가 죽어 무한히 고통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앞으로 굴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덕을 하나하나 넘어가고는 있지만 사실 앞이라는 방향이 가능한건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보면 하나 뒤로 갔다가 하나 앞으로 가는 꼴일 수도, 혹은 큰 나선형을 그리며 요령 없이 이동 중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이런 방향감의 상실은 글과 끝을 맺는 방법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영영 함께 할 것이라는 혼인 서약 같은 것은 부부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서약의 그 순간에는 알기 힘든 것과 같다. 그래서 위인전 속 인물들은 범상한 자들인 것이다. 위인전에 보면 항상 그 위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투쟁하고 죽어라 버텨 위인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다. 사실 위인전의 크나 큰 존재 의의 중 하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릴 때부터 목표를 뚜렷하게 잡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외길을 달려야 하니 어린이 여러분도 어서 꿈을 찾아 어린 나이부터 자만하지 말고 노력하세요, 아니던가. 물론 그들의 인생이 많이 첨삭되어 다듬어진 형태로 책에 실리곤 하지만, 어쨌든 인류사에 업적을 남기려면 시작과 끝의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시작들과 끝을 포기하지 않고 구성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이 시작에 대한 글을 잘 맺기, 정도로 목표를 잡고 또 다른 재미있는 글들을 구상해 보다 보면 그것이 축적되어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만 해 본다. 아직도 더 겪어봐야 완전한 결말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일단은 소소한 목표들로 큰 시작과 끝의 사이를 작은 시작과 끝들로 채워보려 한다.
수많은 시작을 흩뿌리고 있지만 스스로를 돌이키자면 차라리 수많은 삶의 한계들에 대해 부딪쳐 알아가고 있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세상을 바꿀 큰일은커녕 지금 내 한 몸 건사하는 일도 너무나도 바쁘다. 햄릿의 명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매번 다잡지만 이제 슬슬 밤샘을 하면 여파가 일주일은 지속되는 체력이 되어 근근이 생존운동이나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작과 끝맺음의 무한 반복은 나에게만, 혹은 지금 이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두에게, 모든 순간에 찾아올 이러한 시험의 시간, 그래도 시작했다는 것은 어떤 반토막은 만들었다는 뜻일 테니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내서 마무리까지 지어보자. 반토막의 장작을 마무리하다가 영 가성비가 별로인 것 같은 땔감으로라도 쓰면 될 것이 아닌가. 반토막도 쌓이면 거대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