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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08. 2018

배우, 카메라 뒤에 서다 기획전

2018.03.04 - 2018.03.07, 한국영상자료원.

2월 말과 3월 초에 걸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배우, 카메라 뒤에 서다’ 기획전을 다녀왔다. 배우이면서 감독으로 동시에 널리 알려진 경우라면 찰리 채플린, 존 카사베티즈, 우디 앨런, 자크 타티를 비롯해서 다양한 이름들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배우로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은 이후에 감독으로 전향하고도 대단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경우로는 아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독보적인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획전은 이렇게 배우와 감독 양 측에서 흥미로운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것인데, 사정상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세 작품만 관람했다.



1992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영화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감독이자 주연으로 활약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실제 필모그래피 상에 놓일 때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의 협업으로 서부극 장르에서 비교 불가능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배우로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이면서 배우로서 서부극을 비틀어 만든 듯한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들었다는 점은 (그 제목에서부터) 흥미롭다. (한편 영화의 각본을 쓴 데이빗 피플스가 각본가로 참여한 작품이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테리 길리엄의 ’12 몽키즈’와 같은 디스토피아 SF라는 점이, 이 영화의 지향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자막으로 요약되어 제시되는 이야기는 잔악무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킬러의 일을 일삼으며 살아왔던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내를 만나고 개과천선하지만, 아내를 떠나보낸 뒤 회한에 가득찬 삶을 살아간다는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이러한 초반의 줄거리는 영화 속에서 내러티브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서 당연하게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실제 배우 커리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다시 말해 이건 서부극 시대를 대표하는 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기묘한 장르적 성찰의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다소 뒤틀려 있지만) 전형적인 영웅담의 구조를 지닌 이 영화는, 장르적 재미를 일부 지닌 서부극인 동시에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씁쓸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품을 관람하며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극중 인물인 머니에 대한 파토스인 동시에 실제 배우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파토스이기도 하다.



2003년작 ‘미스틱 리버’는 스릴러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적 긴장감과, 드라마 장르가 담아낼 수 있는 영화적 깊이감을 거의 한계에 가깝게 품어낸 걸작이다. 기존 서사극에서 중요한 서브장르로 활용되던 ‘후던잇(whodunnit)’의 추리적인 재미가 극을 내내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한편, 그 안에서는 뒤얽힌 과거 속 현재를 살아가는 세 인물의 드라마가 마치 심연처럼 깊은 곳으로 극을 욱여넣는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한데, 감정을 뿜어내는 션 펜과 감정을 삼켜내는 팀 로빈스의 연기가 무시무시한 가운데 그 중간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케빈 베이컨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미스틱 리버’에서는 이야기의 맨 처음에 제시되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를 망령처럼 떠돌며 어떤 파장을 야기하는지가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어, 극의 초반부에 능숙하게 끌어올린 먹먹한 감정이 극 전체를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화가 마지막에 이르르면 마치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를 카메라의 하강으로 잡아낸다는 점에서 연출적 내공이 아찔하기까지 하다. 아직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다 본 것도 아니지만, 아마 ‘미스틱 리버’는 ‘그랜 토리노’와 더불어 당연히 그의 최고작이어야 할 것이다.



2004년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커리어에서 외부적으로 보자면 가장 엄청난 기록을 남긴 영화가 된다. (이 영화는 2005년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모두 석권했다.) 이 작품은 물론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스트우드가 만들어 낸 다른 걸작들에 비하면 조금 처지는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하다.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스포츠 드라마이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한 명의 인간이 지니는 삶의 태도를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는 인상적인 영화이다. 어쨌든, 90살이 가까워가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고마울 뿐이다. 근래 들어서도 다작을 하고 있는 그가 만든 최근의 작품들만 보더라도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조금 아쉬웠지만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그의 여전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동림(東林)옹, 아무쪼록 앞으로도 만수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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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17 밀리언 달러 베이비 (Million Dollar Baby, 2004)

S018 미스틱 리버 (Mystic River, 2003)

S019 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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