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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31. 2018

오멸의 제주 기획전

2018.03.30, 서울아트시네마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짧게 열리고 있는 제주도 출신 오멸 감독의 근작 기획전에서 그가 만든 두 편의 영화, 2011년작 ‘이어도’와 2012년작 ‘지슬’을 보았다. ‘이어도’는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역시나 좋았고, ‘지슬’은 2013년 3월 극장 개봉 당시 보고 정확히 5년만에 다시 보았는데 여전히 굉장했다. (2010년대에 나온 모든 한국영화 중 아직까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지슬’은 한국 영화 중에서는 유일하게 미국의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곧 개봉 예정이라곤 하지만, 2015년작 ‘눈꺼풀’을 놓친게 아쉽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지슬’은, 역사적 비극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각본가이자 연출가로서 오멸의 미학적 비전이 스크린 속에 얼마나 훌륭하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야기의 형식은 물론 그 깊이도 범상치 않은데, 이 영화는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그리고 소지(燒紙)의 4부로 구성된 구조적 형식부터 위령제의 것을 가져오고 있다. 연기가 매캐한 현장으로 느리게 다가가는 첫 장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아찔하게 마음을 사로잡고, 2부와 3부를 마무리하는 각각의 디졸브 시퀀스와 롱테이크 쇼트는 그야말로 참혹하게 아름답다.



‘신위를 태우며 염원을 비는 것’을 의미하는 4부 ‘소지(燒紙)’의 마지막 장면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잔인한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엄숙한 영화적 위로다. 아마 ‘지슬’의 엔딩 시퀀스는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이어도’ 역시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내러티브에 사건이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지슬’과 달리 한 명의 주인공에게만 집중하는 ‘이어도’의 이야기에서 4.3 사건을 짐작케 하는 것은 두 군인의 존재 뿐이다. (한편 내내 보자기에 싸여 있는 아이의 존재 혹은 부재가 암시적으로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무언극의 형식을 취한 ‘이어도’는 바람이나 파도 소리를 제외한 영화 속 모든 소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까지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영화 내내 배경에 흐르던 음악이 엔딩에서 8분이 넘게 이어지는 노래의 간주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약 70분 동안 반복되던 그 선율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마치 숭고한 제식과도 같이 느껴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기 때문에 오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어도’와 ‘지슬’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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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21 이어도 / Wind of Island (이어도, 2011)

S022 지슬 / Jiseul (지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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