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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21. 2018

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2018.04.12 - 2018.04.17, 서울아트시네마.

현재 활동 중인 영화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감독들을 말하라고 한다면 쟁쟁한 이름들 중에서 곧 폴 토마스 앤더슨을 언급할 것이다. 만약 그 범위를 미국으로 좁힌다면, 더욱 더 주저하지 않고 폴 토마스 앤더슨을 거론할 것이다. 올해 국내에 공개된 그의 신작 ‘팬텀 스레드’까지, 그가 만든 8개의 장편은 모두 걸작이거나 걸작에 가까운 수작이다.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그리고 ‘마스터’는 정말이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매그놀리아’는 아마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를 고르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4월 동안 진행 중인 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를 ‘마쳤다’. 이번 기획전은 그의 걸출한 작품들을 필름 상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정말로 드문 기회다. (잘 알려져 있듯,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 (상업)영화계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쿠엔틴 타란티노와 더불어 디지털이 아닌 필름 작업을 여전히 고집하는 몇 안 되는 감독들 중 하나다.) 그가 매료된 필름 카메라의 ‘룩’과 ‘필’을 의도 그대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기획전은 더욱 특별하다. ‘마스터’, 그리고 그의 데뷔작인 ‘리노의 도박사’가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국내 개봉이 불발되고 2차 시장으로 직행했던)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번 기획전에서 관람한 5편의 작품들에 대해서,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개인적인 생각들을 써 보고자 했다. (스포일러를 피하려 해서인지 이야기가 허공을 짚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언젠간 각각의 영화에 대해 긴 이야기를 풀어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이 뿌리를 두고 있는 미국이라는 시공간의 역사를 특유의 필치로 그려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사회에 대한 교묘한 환유이자 영화에 대한 훌륭한 예술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강렬한 드라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세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혹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유사한 그 무언가가 자주 다루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버려진 관계(‘매그놀리아’)일 수도, 만들어진 관계(‘데어 윌 비 블러드’)일 수도, 혹은 거짓된 관계(‘마스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인물들 간에 확립되어 있는 상대적인 위계가 역전되는 양상이야말로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다. 결국 그가 내놓은 8편의 작품들을 통해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은 줄곧 특정한 소사회 속에서 어떤 인물이 (그리고 관계가) 형성되거나 변성되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999, Magnolia.

‘매그놀리아’는 완벽하다. (이제까지 본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야 한다면, 이 영화는 유력한 후보 중 한 편일 것이다.) ‘매그놀리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정말 끝도 없을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과 비슷한 측면에서) 옴니버스 드라마라 할 수 있겠다. ‘부기 나이트’ 이후 제작 전권을 위임받고 정말 PTA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든 이 작품에는 그의 천재적 재능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목련(magnolia)은 최대 9개의 꽃잎을 피우며, 복잡다단하게 얽힌 ‘매그놀리아’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9명이다. ‘매그놀리아’는 출애굽기 8장 2절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환유하는데, 82라는 숫자는 영화 내내 마치 이스터에그처럼 숨겨져 있기도 하다. PTA의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영화에는 세 가지의 (유사) 부자 그리고 부녀 관계가 중요하게 제시되며,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하고 매듭짓는 것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영화의 구조는 마치 3에서 9로 연결되는 제곱수 혹은 프랙탈과 같은 양상을 반복하며(이 영화는 ‘옴니버스’다), 영화 속 노래에서는 ‘1은 가장 외로운 숫자’라는 가사가 반복되어 불린다. 허나 이 모든 것들은 철저하고 계산적으로 짜여졌다기보다는, 느슨하고 우발적으로 놓여져 있다. 삶이라는 우연과 영화라는 필연. ‘매그놀리아’는 제각기 흘러가는 삶의 아홉 편린들을 압도적인 화술로 짜깁어 3시간에 담아 꽃피워낸 걸작이다.



1997, Boogie Nights.

‘부기 나이트’는 발칙하다. (솔직히 말해서, 개인적으로는 PTA의 필모그래피에서는 그나마 덜 좋아하는 영화이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친 미국 포르노 업계의 뒷세계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PTA라는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내내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이면에 담겨있는 것은 지독히 쓸쓸한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이런 소재를 이런 작법으로, 그것도 데뷔작 이후에 곧바로, 더군다나 27살의 나이에 만들어낼 수 있다니! 저돌적인 동시에 유약한 느낌을 주는 양가적인 영화.



2002, Punch-Drunk Love.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상하다. ‘매그놀리아’라는 야심 가득하고 거대한 작품을 완성한 뒤 3년 뒤에 마치 소품격으로 내놓은 것 같은 이 영화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귀여운 멜로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빛이라는) 색깔로 담아내고 있기도 한데,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영화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어안이 벙벙한 사랑스러움이 이 영화에는 색색으로 형형하다. 어찌 보면 PTA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이한 멜로지만, PTA의 필모그래피 상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가볍고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 아담 샌들러의 필모그래피에서 아직까지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아닐까.



2007, There Will Be Blood.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굉장하다. 영화 자체가 뿜어내고 있는 압도적인 에너지가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넘어 관객석을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은 압도적인 체험이랄까. (거기에 필름 특유의 분위기가 더해지니 이건 말이 필요없다. 필름 상영으로는 이번 기획전에서 처음 보았는데, PTA의 필모그래피에서 필름의 질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연기가 엄청나지만, 거기에 맞불을 놓는 것만 같은 폴 다노 역시 뒤지지 않는다. 세기의 전환점에 놓인 미국의 역사를 (소재의 측면에서는) 은유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플롯의 측면에서는) 직유적으로 풀어가는 이 영화에서는, ‘피’로 드러나는 붉은색과 ‘석유’로 드러나는 검은색이 시종 꿀렁대며 스크린을 끈적하게 적신다. PTA의 필모그래피에서 자주 환기되는 (유사) 부자관계가 가장 직접적으로 도식화된 작품인 동시에, 하나의 세계를 개척해가는 이의 절정과 전락을 모두 마주하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엔딩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악마적인 조소가 뒤섞인 이 기막힌 엔딩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검은 욕망과 붉은 절망. 이 영화는 손에 거머쥔 모든 것을 끝장낼 운명을 지닌 자의 지옥도다.



2014, Inherent Vice.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괴랄하다. (‘매그놀리아’ 직후에 ‘펀치 드렁크 러브’를 만들었듯이) ‘마스터’라는 굵직한 서사를 내놓은 뒤 만든 이 작품은, PTA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가장 불투명하다. 분명 이야기의 얼개가 존재하고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야기의 맥을 쥘 수 없는 느낌을 주는 이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PTA가 이 영화를 만든 의도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하위 문화라 할 수 있을 히피의 역사를 탐정소설의 형태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제멋대로 그려지는 인물들의 양상은, 결국 보험 용어이기도 한 영화의 제목 ‘고유 하자(inherent vice)’와 밀접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약에 취한 듯 몽롱하게, 그러나 동시에 칼로 찌를 듯 날카롭게, PTA는 사회라는 그물망을 해부한다.



2017, Phantom Thread.

‘팬텀 스레드’는 황홀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지만 직전에 개봉했으니 함께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죽 미국 안의 이야기를 다루어오던 그는 극의 배경을 1950년대의 영국으로 틀어버린다.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환기되어 오던 (유사) 부자 관계는 ‘팬텀 스레드’의 (유사) 모자 관계로 치환되고, (‘펀치 드렁크 러브’, ‘마스터’, ‘인히어런트 바이스’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환기되어 오던 상징적인 환각은 ‘팬텀 스레드’에서 기묘한 양상으로 뒤틀린다. 그러나 ‘팬텀 스레드’는 PTA의 필모그래피에서 보자면 상대적으로 친절하고 대중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마스터’와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통해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실험영화의 축을 따라가는가 싶던 그의 필모그래피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금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궤도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다양한 측면에서 그가 앞서 만든 일곱 작품이 떠오르는 이 걸작 역시, PTA의 차기작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최근 소식에 따르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차기작의 각본을 이미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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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27 매그놀리아 (Magnolia, 1999)

S028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1997)

S029 펀치 드렁크 러브 (Punch-Drunk Love, 2002)

S030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2007)

S031 인히어런트 바이스 (Inherent Vic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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